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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 아르토리아 선배……!”

“어라…… 시로?”

뒤에서 들리는 익숙한 목소리에 아르토리아가 걸음을 멈췄다. 뒤를 돌아보니 저 멀리에서부터 꽤나 익숙한 주황색 머리카락이 돌진해오고 있었다. 한참 그녀의 뒤를 쫓아 달려온 걸까. 그제야 걸음을 멈춘 에미야 시로가 거의 기침하듯 거친 숨을 토해냈다. 아르토리아는 다소 의아해하면서도 그가 숨을 돌리는 동안 그저 차분하게 기다려주었다. 그제야 조금 진정한 시로는 멋쩍게 웃으며 이마에 맺힌 땀을 손으로 훔쳐냈다.

“한 번 찾아뵈려고 했었는데 마침 지나가고 계시길래요. 하마터면 길이 엇갈릴 뻔했어요.”

“세상에, 내가 부르는 소리를 못 들었나 봐. 많이 뛰어왔어요?”

“으음. 조금이요. 저기― 저쯤부터?”

“그럼 조금이 아닌걸.”

아르토리아가 미안한 얼굴로 쓴웃음을 지었다. 다른 생각에 푹 빠져 있던 터라 시로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에미야 시로는 아르토리아가 2학년이 되었을 무렵 검도부에 받아들인 후배였다. 처음 검을 잡는 법부터 시작해서 아무것도 모르던 그에게는 많은 것들을 가르쳐주었다. 그게 나름의 인연이 되어 이제는 꽤 친한 선후배 사이가 되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축하한다는 말도 못 했네. 이번 내부 평가전, 시로가 2학년 중에는 1등이라면서요?”

“벌써 들으셨어요?”

“그럼. 잠깐 활동을 쉬긴 하지만 탈퇴한 건 아닌걸. 소식은 다 듣고 있어요.”

아르토리아가 웃으며 대꾸했다. 예기치 못한 모종의 ‘사고’가 발생한 지 일주일. 제 상황을 파악한 아르토리아는 제일 먼저 하루도 빠지지 않았던 검도부에 당분간은 오지 못할 것이란 통보를 했다. 사람이 많이 있을 낮이라면 몰라도 인적이 드물어지는 시간에 학교에 남는 것은 현명하지 못하다는 조언에 따른 것이었다. 물론 검도부의 주장이며 에이스인 아르토리아의 통보에 검도부가 벌컥 뒤집어지긴 했지만 아르토리아로서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시로에게는 알려주지 못했는걸.

아르토리아가 그제야 생각난 사실에 고개를 갸웃했다. 하필이면 그날 시로가 부활동에 오지 못한 탓에 그로서는 이 사실을 건너 건너서나 들었을 터다.

이제라도 말해주어야겠네. 그런 생각을 하며 시로를 바라보자 그는 처음으로 평가전에서 1승을 따낸 날처럼 얼굴이 환해져 있었다.

“아, 저…… 그럼 검도부를 나가신 건 아니신 건가요?”

“그럼. 왜 그렇게 생각했어요?”

아르토리아가 웃으며 대꾸하자 이번에는 갑자기 시로의 얼굴이 벌게졌다. 그 모습이 의아해서 아르토리아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제야 시로가 더듬거리며 제 사정을 털어놓았다.

“저어…… 사실, 다른 선배들이…… 이제 아르토리아 선배 못 봐서 어떡하냐고 막 놀리시는데…… 그냥 이제 앞으로 안 오신다는 말만 하셔서…… 혹시라도 그만두신 건가 하고 생각했었거든요…….”

“아.”

아르토리아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검도부 사람들의 장난기야 모르는 바가 아니었으니 응당 시로에게는 따로 언질을 주는 게 나았을 텐데, 정신이 없어 까맣게 잊어버린 탓이다.

“이런. 말을 해 줬어야 하는데 깜빡했네. 조금 개인적인 사정이 생겨서 정신이 없었거든…….”

“아, 아니에요! 저, 저는 그냥…… 이제 진짜로 선배를 볼 수가 없을까 봐…… 그런데 멀찍이에 선배가 보이시길래요…….”

부끄러웠는지 시로는 얼굴이 벌게진 채로 횡설수설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 모습이 우스워 아르토리아는 풋하고 웃고 말았다. 그 모습을 본 시로는 갑자기 말문을 닫더니 얼굴이 더더욱 빨개진 채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저, 저는 그러면…… 그저 잠깐 쉬시는 거니까…… 그동안 더 열심히 연습하고 있을게요……! 그…… 무슨 일이신지는 모르겠지만 잘 해결되셔서 금방 돌아오셨으면 좋겠어요…….”

“응, 응원해줘서 고마워요, 시로.”

아르토리아는 온화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로는 눈도 제대로 맞추지 못한 채 비척비척 몸을 돌렸다.

“아…….”

아르토리아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뒤로 돌아서던 시로의 손끝에 걸려있던 꽃다발을 발견한 탓이었다. 엷은 분홍빛 리본이 하늘하늘 흔들렸다. 그제야 시로 역시 제가 들고 있던 꽃다발을 기억해낸 듯 당황한 표정이 되었다.

“아, 저, 이건…….”

잠시 당황하던 시로의 얼굴이 터질 것처럼 빨개졌다. 아르토리아의 표정 역시 다소 난감해졌다. 불현듯 시로가 할 행동을 예상했던 탓이다. 하지만 이미 고개를 푹 숙인 시로는 그런 아르토리아의 표정조차 보지 못한 채, 그저 불쑥 제가 들고 있던 꽃다발을 아르토리아에게 들이밀었다. 연분홍빛 장미들이 소담스럽게 담긴 꽃다발이었다.

“저, ……선배께서 많이 가르쳐주신 덕분에 1위를 할 수 있었어요. 앞으로도 더 많이 배워야겠지만…… 감사하다는 뜻에서 선배께 꼭 드리고 싶어서요…….”

“하지만 시로…….”

“정말로, 이건 감사하다는 마음에서 드리는 거니까. ……받아주시면 안 될까요?”

아르토리아가 난처하게 시로의 이름을 불렀지만 시로는 고개 한 번 들지 않았다. 다만 빨개진 귀 끝을 볼 때 그가 지금 어떤 심정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르토리아는 제게 내밀어진 꽃다발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서로 색이 다른 분홍빛 장미들이 문양을 이루듯 조화롭게 배치되어 있었다. 안개꽃과 시네신스, 그리고 그녀가 이름조차 알지 못하는 꽃들이 풍성한 다발을 이루었다. 문득 그녀는 흐드러진 꽃이 피어있던 어떤 풍경을, 그리고 거기에 몹시나 어울리던 누군가의 모습을 떠올렸다.

“고마워요, 시로. 하지만 1위를 한 건 시로가 열심히 한 덕분인걸. 제가 이런 걸 받을 순 없어요.”

“하지만 선배.”

시로가 문득 고개를 들어 아르토리아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간절한 눈으로 아르토리아를 바라보며 그는 애원하듯 덧붙였다.

“선배가 아니었다면 절대로 이렇게는 할 수 없었을 거예요. 선배께서 하나하나 가르쳐 주신 덕분에 이만큼이나마 할 수 있었는걸요. 정말로…… 이건…… 감사함의 표현일 뿐이에요. 제발, 받아주세요.”

문득 아르토리아가 멈칫했다. 어쩐지 자신을 보는 시로의 시선이 익숙하다고 생각했다. 그 시선은, 마음속에 깊은 응어리를 숨긴 채 웃을 수밖에 없던―.

“자, 여기요.”

문득 든 생각에 멈칫하던 아르토리아에게 시로가 마치 떠넘기듯 꽃다발을 들이밀어, 아르토리아는 저도 모르게 꽃을 받아들고 말았다. 아차 싶던 것도 잠시, 시로는 재빠르게 한 발짝 물러서 돌려줄 기회조차 차단해버리고 있었다. 아르토리아는 멍하니 눈을 깜박거렸다. 아마도 하고 싶었던 말이 많았을 것 같지만 그는 그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웃는 얼굴을 짓고 있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던 것은, ……그 웃는 얼굴이 몹시도 자신의 것과 닮아 있어서.

“저, 시로.”

“저는 이만 가볼게요. 바쁘신데 붙들어서 죄송해요. 어서 일이 해결되셔서 부실에서 뵐 수 있으면 좋겠네요. ……그럼 안녕히 계세요!”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한 채로, 시로는 후다닥 뒤를 돌아 달려갔다. 아마도 저쪽에서 기다리고 있었을 그의 친구와 합류하는 게 멀찌감치 눈에 들어왔다. 그저 사라져가는 후배를 잡지도, 쫓아내지도 못한 채 아르토리아는 멍하니 그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 손에 들린 꽃다발은 사랑스러울 정도로 아름다웠다. 마치 꽃이 만발한 들판 한가운데 선 것처럼 향긋한 내음이 느껴졌다. 어떤 마음으로 준비했을지, 여실히 알 수 있을 만한 그런 모양새였다.

물끄러미 다발을 내려다보려니 조금 전보다도 훨씬 진한 향기가 훅하고 밀려들었다. 누군가의 가벼운 발소리가 사뿐히 그녀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렇지만 생각에 빠진 아르토리아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아니면 단순히 고개를 들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엿차. 역시 우리 마스터는 인기도 좋아― 서번트로서는 정말 뿌듯한걸?”

“……장난치지 마세요, 캐스터. 갑자기 사라져서 어디로 가버렸나 했더니. 일부러 사라지셨던 거죠?”

“으응, 글쎄―? 하지만 낯선 사람이랑 같이 걸어가는 모습이라면 그것도 마스터가 둘러대기 곤란하잖니?”

의뭉스럽게 말꼬리를 늘리며 멀린이 생글거렸다. 그제야 고개를 들어 제 서번트를 바라본 아르토리아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푹 내쉬었다.

우연히도 성배전쟁이라는 살육전에 뛰어든 것이 어언 일주일. 그녀는 이 장난기 많은 서번트를 벗 삼아 싸워나가게 된 입장이었다. 그 덕분에 한 번도 빠진 적 없는 검도부 활동도 빠지게 되고, 그러다 이런 난데없는 꽃다발 선물까지 받아버리게 생겼다.

시로는 우연히 만났다고 했지만 아마 이런 꽃다발까지 들고 다녔다면 오늘은 작정하고 집에 가는 자신을 찾아온 게 분명했다. 그리고 아마도, 이건 단순히 1위를 했기 때문에 준비한 감사의 선물일 리는 없을 것이다. 사실 그것보다 더한 마음을 담아 준비했던…… 그런 선물일 테지.

아르토리아는 문득 제게 꽃다발을 내밀던 시로의 얼굴을 다시금 떠올렸다. 자신이 받아주지 않는다면 금방이라도 울 것 같던 눈동자는 끊임없이 겁을 내듯 흔들리고 있었다. 깊은 마음을 감춘 채, 그나마 상대방이 받아줄 수 있는 말과 감정만을 간신히 걸러내고 있던 모습. 그녀가 그 사실을 금방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은, 그 모습이 거울을 보듯 자신과 똑 닮아 있던 탓이었다.

“이런 건, 받으면 안 되었는데…….”

아르토리아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흔들었다. 그 모습에 저도 모르게 마음이 약해져 떠안듯이 꽃을 받아들고 말았다. 평소의 그녀였다면 정중하고도 단호하게 거절했을 터인데. 게다가…… 그녀는 그 마음을 받아줄 수 없을 터인데도.

아르토리아는 살짝 멀린의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멀린은 여느 때와 꼭 같은 모습으로,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된다는 양 어깨를 으쓱인 채로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오늘은 평범한 남녀인 척 꾸미고 중심가를 탐색하기로 한 탓에 그는 언제나 입고 있던 희고 화려한 로브 대신 간편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옷은 일견 수수해 보였지만 목에 휘감은 스카프만은 마치 깊은 바닷속의 물결처럼 검푸르게 빛났다. 아르토리아는 문득 멍하니 인간답지도 않게 아름다운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목에 감긴 스카프가 바람에 날리자 그가 손을 뻗어 그 끝자락을 붙들었다. 은빛 머리카락이 물비늘처럼 반짝이며 바람에 흩어졌다. 다른 한 손으로는 그 머리카락을 붙든 채, 남자는 문득 아르토리아를 향해 몸을 돌렸다.

몹시 드문 해 질 녘의 하늘처럼, 말간 보랏빛으로 물든 눈동자가 반짝거렸다. 아름다운 눈매가 곱게 휘며 호를 그렸다.

그렇다. 그녀는 시로의 꽃다발을 받아주면 안 되었다.

그녀는― 기적처럼 그녀를 찾아온 이 아름다운 남자를, 이미 사랑하고 있었으므로.

이 우연한 사고가 끝난다면 금방이라도 그녀를 떠나버리고 말, 다시는 볼 수 없을 영령이라는 존재를.

어째서 이렇게 되고 말았을까 자문한 적도 있었다. 그를 좋아해선 안 된다고 스스로를 타이른 적도 있었다. 하지만 고운 염료가 비단에 묻어나듯이, 연심은 쉽사리 그녀의 마음 안에 스며들었다. 번민해도, 부정해도 그 마음은 분명히 존재했다. ……마치, 아주 오래전부터 그녀의 안에 스며 있었던 것처럼.

그러나 그 마음을 드러낼 수는 없었다. 마치 제가 할 말을 예상하기라도 한 듯, 멀린은 상냥하지만 단호하게 그녀의 마음을 부정하고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간신히 꽃다발을 내밀던 어린 후배의 모습은, 그녀 자신과 똑 닮아 있었다.

‘영령이라는 건 말이야, 결국 영웅의 그림자나 마찬가지야.’

아르토리아는 그날의 대화를 또렷이 기억한다. 해가 지던 시간, 노을을 등진 채 그녀를 바라보던 남자의 미소는 지독히도 아름다웠다. 그 미소가, 그녀의 마음을 조각내기 위해 그려진 것임에도 그러했다.

‘영웅 그 자체가 될 수 없고, 다만 그 힘을 빌리기 위해 흉내 낸 그림자들. 좌로 돌아가지도 못한 채 흩어져버릴 감정과 추억을 끌어모으는 존재들이지.’

마치 제3의 존재에 대해 설명하기라도 하듯, 그녀의 캐스터는 냉정하게 스스로를 평가했다. 그저, 이 시간이 끝나면 사라져버릴 허상에 불과하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영웅의 흔적을 담은 채로 현실의 존재들을 현혹하곤 하지. 이 시대를 살아가는 평범한 인간들에게 영웅이란, 지나치게 아름다운 이상의 것들이니까.’

멀린이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반짝이던 은발의 끝이 노을의 빛으로 물들어가고 있었다.

‘그러니 네가 나에게 가지는 감정들은…… 결국 동경에 불과한 것들이란다.’

그의 얼굴이 어떠했더라. 빛을 등진 얼굴은 어두워 흐릿했다. 그저 희미하게 웃고 있던 그의 입매만이 또렷이 기억난다. 그녀를 상처입히며, 그는 마치 자신이 상처 입은 듯한 그런 웃음을 짓고 있었다.

‘그러니…… 너는 과거의 것들이 아닌 이 시대의 것들을 사랑하도록 하렴.’

가만히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고 시선을 맞추어주며 마술사가 다정히 웃었다. 언제나 차가울 정도로 무기질적이라고 생각했던 눈동자가 누그러졌다. 그 어느 때보다도 다정한 목소리로, 그 무엇보다도 비수 같은 말을 속삭였다.

‘그것이, 네가 누려야 할 정당한 것들이란다.’

내가 아니라.

‘…….’

어떤 말로도 대꾸할 수가 없어서, 아르토리아는 그저 고개를 떨어뜨렸다. 시작하지도 못한 채 끝내라 종용당한 감정이 터질 듯 넘실거렸다. 그렇지만 그 무엇 하나 보일 수는 없어, 그녀는 어떤 말도 입술에 담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렇지만…….

아르토리아는 문득 저 먼 지평을 바라보고 있던 멀린을 바라보았다. 그는 마치 현실로 걸어 나온 요정이라도 된 것처럼 반짝이는 머리칼을 만지작거렸다. 현실의 모든 것을 압도해버리는 아름다움은 이 시대의 것이 아닌 양 아름다웠다.

문득 바람이 불었다.

어딘가에서 꽃잎이 비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그 꽃잎의 비를 맞으며, 멀린이 문득 고개를 돌렸다. 그녀를 향해 곱게 휘어지는 눈매가 꽃처럼 고왔다. 아르토리아는 멍하니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가 자신을 바라볼 때면, 언제나 마음 한구석이 아릿하게 베어지는 듯한 기분이 든다.

감당할 수 없는 애정이 물밀듯 밀려드는 듯한 그런 기분.

……그 달콤함에 그녀는 사랑에 빠졌는데.

영웅에 대한 동경이 아닌, 그 숨 막힐 듯한 애정의 해일 속에서.

파란 하늘 아래에, 반짝거리는 은발이 흩날렸다. 그린 것 같은 얼굴은 인간이라기엔 비현실적이고 완벽한 아름다움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가 그 말간 눈동자를 그녀를 향해 돌리고 부드럽게 미소지었을 때면.

아르토리아는 그 다정한 눈빛에서 바다보다 깊은 애정을 발견하고 만다.

문득 눈시울이 시큰해졌다. 이 아름다운 광경과, 이 깊고 달콤한 감정이 그녀를 사로잡고, 그리고 그 무엇하나 붙들 수 없음에 상처받으며. 도무지 그를 바라볼 수 없어 저도 모르게 고개를 떨어뜨렸다.

끝끝내 차오르는 감정들이 입술에 흘러넘친다.

그저 입 끝에서, 아무도 알 수 없는 한숨처럼 흩어지며― 그녀는 끝끝내 사랑할 수도 원망할 수도 없던 제 파트너를 향해 눈물짓듯 속삭였다.

그렇게, 나의 마음을 부정할 거라면. 내가 당신을 사랑해선 안 된다면.

제발 그러한 다정함을, 애정을 주지 말아요.

……나는,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해줄 터이니.

……나는, 이 마음을 그저 깊이 감추어둘 터이니.

“……아르토리아.”

문득 따뜻한 손이 그녀의 머리 위에 얹혔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아르토리아가 간신히 제 시선을 끌어올렸다. 어딘가 근심스러운 얼굴로, 멀린이 그녀의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고 있었다.

“괜찮니? 갑자기 고개를 떨어뜨리고선…….”

서로의 시선이 마주쳤다. 붉게 달아오른 눈시울을 본 멀린의 눈동자가 동그래졌다. 그제야 아차 싶어서, 아르토리아는 간신히 제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아, 아니…… 아니에요. 그저, 아주 잠깐, 다른 생각을…… 했을 뿐인걸요.”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척 웃는 자신을 바라보면서도 멀린은 입술만 몇 번 달싹거렸을 뿐 끝내 아무 말도 해주지 않았다. 다만 그는 가만히 다정하게 휘어진 눈매를 맞추며 쓰게 웃었다.

“……그래.”

모든 것을 알면서도, 그 무엇도 입술에 올리지 않은 채 마술사는 그저 모른 척 고개를 끄덕였다. 가만히, 그의 손끝이 아르토리아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 손끝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던 것을, 아마 그녀는 평생 알지 못했을 테지만.

“자, 이제 어서 가도록 해요. 오늘도 바쁜 하루입니다. 밤이 오기 전에 돌아다니는 것이 훨씬 안전할 테지요.”

“……그래.”

아르토리아는 애써 씩씩하게 목소리를 내며 걸음을 옮겼다. 고개를 들고 또렷이 걸어가는 그 뒷모습 어딘가가, 안아주고 싶을 만큼 애처로워 멀린은 말없이 그 모습을 시선으로 좇았다. 손에 든 꽃다발은 어딘가 힘없이 손끝에서 달랑거렸다.

그보다 좋은 것들을 주고 싶은 마음을 깊숙이 파묻으며― 그 무엇도, 그녀가 지금 누리는 이 시대의 것들보다 좋을 수 없음을 애써 되새기며, 왕의 스승은 숨길 수 없는 애정을 다만 최선을 다해 억눌렀다.

그렇지만. 그런데도, 도무지 참을 수가 없어서.

앞서 걸어가는 아르토리아의 머리카락 사이에는 그녀도 눈치채지 못한 몇 가닥의 꽃송이들이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햇살 같은 금빛 머리카락 사이에 흔들리는 꽃잎은 한때의 꿈처럼 아름다웠다. ……아주 먼 옛날, 한 소녀와 마술사가 다정히 웃고 있던 어떤 낙원의 꿈과도 같이.

이제는 사라져버린 시간의, 잊혀진 애정과도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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