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녀는 제발 아이를 빼앗지 말아달라는 애원을 뭇하고 여인을 침상에 밀쳤다. 포대기에 싸여 요람에 곤히 잠들어 있는 아기를 품에 껴안고 그녀는 문 앞에서 아이를 남겨 달라 간절히 비는 남자까지 무시하고 문을 열었다. 위아래로 살살 흔들리는 요람에서 녹빛 눈을 쇠사슬처럼 반짝이고 있던 아이는 느닷없이 자신을 끌어안는 손길에 놀라 눈을 반짝 떴다가 놓여진 밤하늘을 빤히 바라보았다. 마녀는 양배추의 대가로 그녀를 바랬고 어찌 되었건 간에 그들의 약속은 지극히 정상적으로 이행되어 아이는 마녀의 손에 들어갔다. 사람들은 부부의 불행을 창틈으로 몰래 지켜보며 자신에겐 무사히 남은 것을 기뻐했다. 약 십육 년의 시간이 지나 그 갓난아이가 어떻게 쓰일지 알았더라면 과연 그 부부가 아이가 빼앗기도록 내버려 두었을까. 일어나지 않은 일은 알 수 없는 일이었지만, 아이에게는 아르토리아라는 이름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일로 라푼젤이라는 별칭을 받게 되었다.
아이의 친어미는 꽤나 훌륭한 용모의 여인이었고 그것을 따라 아이 역시 아름다운 용모의 소녀로 쉽게 사라졌다. 칼에 비친 얼굴은 생소하니 하얗고 우유라도 부은 것처럼 보들보들했다. 피가 가득 묻어 뚝뚝 떨어지는 와중에도 물푸레나무처럼 희고 고왔다. 자신이 아름다운 만큼 소녀는 잎사귀 가득 파묻힌 양배추를 닮게 자랐고 몸은 불타오르는 것처럼 흉내만 내고 새처럼 살았다. 그녀가 어떻게 거기까지 가게 되었는지 본인은 알 리가 없었지만 소녀는 광대가 된 것처럼 날뛰고 살얼음 돋는 창가에서 새처럼 지저귀었다. 탑의 창에 매달려 무릎을 꿇고 하늘을 볼 생각은 않고 땅만 내려다보며 낚시에 열중하는 할 일 없는 사냥꾼이었다. 매일같이 사내가 지나칠 때마다 고양이처럼 긴 머리카락을 내려 꼬드기고 유혹했다. 마녀가 가르쳐 온 것처럼 아이는 겨울에 피어난 동백처럼 그 누구보다도 아름답고 두려운 것이었다.
“남자란 여인을 괴롭히고 배신하는 잔인한 생물이란다. 네가 죽이지 않으면 그만큼 여인들을 괴롭히겠지.”
그래서 사내들은 그녀의 꼬드김에 넘어갔다. 탑의 방에 어두운 촛불 하나로 살갗을 매끄럽게 비추고 다리를 나긋하게 피고 있으면 그들은 그녀에게 밧줄을 내려달라 휘파람을 불곤 했다. 젊을 적의 어머니를 배신하고 마녀란 이유로 죽이려 했던 것은 바로 그런 남자들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그런 것들은 다 죽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른 이의 아픔 따위 알지 못하고 바로 말한 것조차 잊어버리는 배신과 유혹을 반복하는 자들, 항아리 안 죽처럼 펄펄 끓는 것처럼 서글어지는 사내들은 흐물흐물 죽어갔다. 다른 이가 자신처럼 아프지 않길 바라고 또 그래서도 안 된다고, 그녀의 어머니는 그렇게 가르쳤다.
그런 어머니의 고상하고 사랑스러운 마음씨에 감동한 딸은 탑에 갇혀 자유로운 괴물이 되었다. 반대로 자신은 그런 사실을 알지 못했지만, 그녀는 숲을 지나다니는 사내들을 유혹해 탑에 오르게 했고 그 살갗이 자신에게 닿기도 전에 칼로 쑤셔 그 시체를 난로에 처넣었다. 힘겹게 다 익은 살점들을 창밖으로 던지고 나면 지나다니는 짐승들은 이로 뜯고 부리로 파먹었다. 그것이야말로 그들이 제일 잘 할 수 있는 마지막 선한 일이라 라푼젤은 피로 젖어 흘렀다. 삼십일의 밤이 멀다하고 죽어나가는 사내들이 넘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숲으로 들어오는 이들은 그치지 않았다. 마치 영영 마르지 않는 샘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자신만은 특별하리라 믿는 자들의 최후였다.
굴러다니는 뼈다귀가 시들시들해지던 무렵, 아르토리아는 고심하다 못해 초췌해진 얼굴로 달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제는 사람도 찾아오지 않는 어두운 숲에 누군가 새로이 들어온 것도 모르고, 단 하나의 방에 놓인 욕조에 꽃잎을 뿌리고 어설프게 동여맨 머리를 담구고 있었다. 방을 몇 번이고 두를 정도로 길게 자라는 밧줄을 공들여 준비한 아르토리아는 창밖으로 보이는 달로 바람에 자신을 적셨다. 또 하나 누군가가 호기심에 그 붉은 눈에 나뭇가지를 헤치고 자신을 바라보는 것을 알지 못했다. 그 고운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굳건한 의지가 붉은 산수유처럼 맺힌 것을 그가 탐욕스럽게 지켜보는 것을 알 리 없었던 미인은 별처럼 빛났다. 두터운 책이 종잇결 사이로 불을 삼킨 것처럼 그는 무언가에 빨려 들어갔다. 흥분으로 차가워지는 손에 남자는 누르고 있던 나뭇가지를 빼내고 손에 들린 술병에서 온기를 찾았다.
“창녀처럼 우아한 계집이로구나.”
“....!”
새벽에 일어난 소녀는 고양이처럼 놀라 붉은 입술로 깨물고 말았다.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한 것인지 하얗게 질린 얼굴에 핏줄이 가늘게 배인 것을 알아본 사내는 금란처럼 아름다운 얼굴에 웃음을 띄웠다. 오랜만에 만난 사내란 자가 생전 처음 만나보는 여유로운 이가 아르토리아는 급하게 손으로 신음을 삼키고 방안으로 달려들었다. 금빛 머리카락 가득 파란 리본을 감은 것을 바라본 그녀는 잠시 혼란스럽게 창가로 달려왔다 확인하고는 돌아갔다. 소문과는 다르게 딱히 그를 유혹하려는 태도를 보이지도 않았고 반대로 보기만 해도 도망치는 것을 의아하게 여긴 이는 무례한 언사로 희롱하고 유혹했다. 그 무례함에 입가를 굳힌 소녀에게 그는 속삭이듯 유혹했다.
“알고 싶은 것이 있지 않으냐?”
길가메쉬는, 그는 바로 얼마 전에 젊은 과부가 탑에서 목숨을 잃은 사실을 알고 있었다. 숲은 여자가 들어가면 안 된다는 금기를 어기고 맨발로 달려와 탑의 마녀에게 저주를 퍼붓고 침을 뱉은 과부는 시체로 발견되었다. 누가 죽였는지는 묻지 않아도 알아서 그는 저 미인이 왜 힘들어 하는지 짐작이 가 웃기만 했다. 어린 계집이 무엇을 찾고 싶어 하는지 그는 알았다. 배신당한 것을 알면서도 그를 해한 이를 증오하고 저주하게 만드는 그 힘의 근원을, 어린 마녀는 찾고 있었다. 떨리는 푸른 눈을 바라보며 붉은 눈의 사내가 달콤하게 말했다.
“사랑을 가르쳐주마.”
라푼젤은 잠시 침묵했지만 곧 길게 부스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길고긴 밧줄이 눈앞으로 흘러내렸다. 황금을 가득 녹여낸 밀빛 머리카락을 사랑스럽게 지켜보고 곧 움켜쥐었다. 고리에 걸려 아슬아슬 흔들리는 옅은 황금의 밧줄을 한 번 더 손에 감고는 무거운 무게를 이기고는 방에 들었다. 강도처럼 검은 천으로 자신을 가린 잘생긴 남자는 어울리지 않게 두터운 근육에도 잃지 않는 날렵함으로 그녀를 찾았다. 설핏 천 아래로 보이는 입술이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아름다운 소녀는 떨리는 몸을 주체하려 애쓰며 제자리에 서서 입을 벌렸다. 피가 맺힌 것처럼 차갑고 도드라진 입안에서 무서운 말이 튀어나왔다.
“당신은 날 배신하면 안돼요.”
이유모를 원망이 섞인 말에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에게 몸을 마음껏 내맡기는 소녀를 끌어안아 전에 없을 열락을 따듯한 것을 선사했다. 스스럼없이 얇은 천속으로 손을 넣었고 아르토리아는 그 생소한 온기에 놀라 발끝을 높이 세웠다. 그 짤막하게 스쳐지나간 비명에 그는 겁먹은 소녀를 끌어안고 침대로 가 눕혔다. 다가오는 손길 하나하나 생각과는 다르게 너무도 부드럽고 다정해 그녀는 잠시 어쩔 바를 몰랐다. 어깨로부터 다가오는 사람의 온기와 허리에 맞닿는 단단한 뼈가 부끄러워해야 할 것 같았지만 흰 레이스 옷이 까슬하게 가슴을 긁고 내려갔다. 그의 눈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이건 뭔가요?”
열락을 나누고 침대에 누워 그의 품에 안겨서 마녀의 딸이 멍하게 중얼거렸다. 처녀가 묻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지금 나누었던 행위를 묻는 것을 알고 그가 크게 웃었다. 그녀가 무지한 것은 알고 있었기에, 그는 더욱 스스럼없이 입에 거짓말을 담았다.
“계집과 사내가 기쁨을 나누고 체온을 따스하게 섞는 행위이니라.”
“좋은 것이군요.”
그가 입에 담는 거짓말과는 다르게, 매번 그녀의 속을 긁던 오만한 사내는 꽤나 다정했다. 아침마다 찾아와 그녀가 머리를 내려주기를 기다렸다. 문득 자신을 무례하게 괴롭히던 기억이 나 모르는 척 자는 척 머리를 내려주지 않는 계집에게 눈썹 한번 찌푸리고 말았고 불편함을 감수하고도 그녀를 돌보는 다정한 손길의 주인이었다. 왠지 그가 자신을 그렇게 만들 것 같아 무서울 때도 있었지만 이렇게 다정하게 안아주는 사람을 믿고 싶어서 그녀는 안달했다. 점차 가시나무처럼 서 있던 자신을 녹여낸 마녀의 딸은 어머니도 주지 못했던 무언가를 찾고 싶어 했다.
길가메쉬는 황금을 녹인 듯한 금발과 서글한 붉은 눈을 가진 청년이었다. 용모가 수려하고 잘생긴 것도 그녀의 마음을 녹이는 데 한 몫 했다는 것을 부정하기는 힘들었다. 물론 보이는 것과 다르게 간혹 보이는 섬세한 손길과 다정함에 어미에게 매달린 것처럼 그녀는 품에 자신을 밀어넣고는 했다. 마녀를 피해 찾아올 때마다 매번 바구니를 가득 채워오는 연인은 어디서 가져오는지도 모를 갖가지 진미와 연인이 밀랍인 것 마냥 손톱으로 꾹꾹 자신의 자국을 남기는 심술궂으면서도 낙관적인 남자였다. 그녀가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쓸데없이 생각을 못하게 하려는 것인지 그 큰 손으로 얇은 피부를 누르는 것이 아르토리아는 너무 좋았다. 그의 입술에 잼을 바르고 강아지처럼 뺨과 입술이 붉은 알갱이가 번지도록 핥아대면 그는 더욱 즐거워했다. 그가 어른의 몸으로 아이처럼 천진하게 웃는 것을 보고 그녀는 알아챘다. 이것은 봄의 단맛처럼 녹아드는 첫사랑이었다.
“나를 사랑해 보아라, 아르토리아.”
그런 오만한 말이 필요 없을 정도로, 그의 눈에 담겨있는 시간이 아르토리아에게 있어서는 가장 평화로운 시간이었다. 지금까지의 모든 것이 이때를 위했던 것처럼 소녀는 사내의 품에 안겼고 그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 낮에 찾아드는 새 같은 남자를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온갖 꽃과 장미수로 치장했다. 비록 화려한 것은 좋아하지 않는 성정이었지만 그가 가져오는 것은 반드시 달아 그를 기쁘게 했다. 걸치는 옷이 점점 간소해지는 것은 착각 탓이 아닐 터였다. 점점 어머니가 찾아오는 시간이 방해가 된다고 생각해 버릴 정도로, 마녀의 딸에게는 이변이 생겨나고 있었다.
“이상하게, 달일이 오지 않아요.”
한편, 아르토리아는 그와 나누는 행위를 유독 좋아하게 되는 중이었다. 그가 칭찬하고 즐거워하는 것도 이유였지만 그녀 역시 기분이 좋아지는 행위의 주도권이 주어졌던 덕이었다. 단순히 벌거벗은 몸을 엉겨 붙고 스스로 다리를 들고 허리에 오르는 행위가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그녀가 알았더라면 아마도 그를 밀어냈겠지만, 안타깝게도 탑의 아르토리아는 알지 못해서 마음껏 연인을 유혹하고 유혹당했다. 항시 어미에게 모든 권위를 내줘야 했던 아이에게 주도권을 넘겨준 것은 높은 한 수라, 살살 꼬드기듯 다가오는 칭찬에 아르토리아는 부끄러운 것도 모르고 더욱 망설임 없이 그의 위를 기었다. 세상의 기쁨을 알려주겠다는 명목으로 아이를 유혹했고 몸과 머리만 자랐을 뿐 정작 세상에 대한 지식이 아주 없다시피 한 소녀를 제 몸 안에 삼켰다. 길가메쉬는 분명히 볼록 튀어나온 배를 만지면서도 입술에 침도 묻히지 않고 거짓말을 내뱉었다.
“아기집이 자라는 것이니라.”
“아기집?”
사내를 유혹하는 것만 알고 그 이상은 알지 못했던 아르토리아는 놀라 벌떡 일어났다. 자신에게 아기가 생길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놀랐지만 곧 더욱 기뻐했다. 좋아하는 사람과 다정히 맞붙어 새롭게 생명이 태어난다니, 이보더 더 신성하고 아름다운 것이 없었다. 아르토리아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여 기뻐했다. 아기집이 생겨 자라나는 요 몇 달은 몸을 조심해야 한다는 말을 듣고도 그저 간단히 믿고 신뢰했다. 의심조차 없이 답답하고 피로 질척한 일상에서 완전히 벗어났다는 것이 기뻤고 믿고 사랑하는 연인이 기뻐해서 더욱 즐거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에게 입을 다문 것은 자신도 무의식중에 들킬 것을 두려워하고 있었기 때문이지만, 더 이상 생각하는 것을 거부한 아르토리아는 매일같이 찾아오는 연인에게 머리를 내리고 맞아들였다.
길가메쉬의 품안에 안겨 그 팔이 저리도록 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을 무렵, 마녀는 바닥에서 짧은 금발의 머리카락을 발견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변명하는 딸의 귓가에 새하얀 옥으로 반짝이는 귀걸이가 있는 것을 마녀는 알아채지 못했고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어설프게 거짓말하는 딸의 성정을 알아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그렇게 몇 달을 반복해가는 일상에서 변하지 않은 것은 어미뿐으로, 마녀가 어린 딸의 부탁으로 촌락과 마을을 돌아다니며 이것저것을 구하고 사들이는 와중에 아르토리아는 황급히 바닥에 떨어진 그의 머리카락과 흔적을 지워내고 있었다.
“당신, 정말 아내는 없겠지요?”
“없다고 몇 번을 말하느냐. 계집이라면 있었다만 다 내쳤느니라.”
나에 대한 신뢰가 그리 부족한 것이냐, 투덜거리며 이제는 조금 단단해진 배를 몇 번이고 쓰다듬어서 아르토리아는 웃었다. 그녀를 씻길 물통에 직접 물을 채우고 나서야 길가메쉬는 그녀를 들어 담구었다. 검으로 다져진 날렵한 손이 거친 와중에도 섬세하게 다루는 것이 어울리지 않는 듯 어울렸다.
“아직 아이가 들어서지 않았는데도 그리 좋으면 아이가 생기고 나서는 얼마나 좋아하시려고 그러십니까.”
“내가 사랑하는 것을 사랑하는 것이 무엇이 문제란 말이냐.”
점차 옷으로 가리기 힘든 몸이 되고 연인은 하루도 빠짐없이 탑을 찾아들어 이후의 생활이란 것을 약속했다. 다정한 부군과 아비가 되어 줄 것이라는 끈적한 약속, 깨어있는 시간보다 조는 시간이 더 많은 그녀를 사랑해주는 그는 진정 좋은 사람이었다. 슬슬 탑을 떠나자는 그에게 장난을 칠 수 있을 정도로 아르토리아는 가득 녹아 안겨있는 사랑이었다. 비록 그가 어떤 사람인지는 몰랐지만 작약처럼 고운 자신을 사랑해주는 것만을 알았다.
의아한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사내에게 아르토리아는 부른 배를 끌어안고 노려보았다. 이제는 주도권이 자신에게 옮겨왔다는 것을 명시하듯이 새처럼 입술을 내밀고 뾰루퉁하게 쏘아붙였다.
“그 ‘데려간단’ 뜻이 영취(迎娶)인지 그저 입내(入内)인지 묻고 있는 겁니다.”
“흐하하하하하, 아직 시집도 안 온 것이 벌써부터 기를 잡으려 드는구나, 어디 올리고 나면 계집들이 살아남기라도 하겠느냐?”
떠나려던 것도 멈추고 자신의 계집을 희롱하는 것을 아르토리아는 심술궂게 받아들였다. 그리 오만하고 누구에게도 굽히는 일 없는 남자가 막히는 것 없이 애정을 쏟을 수 있는 것도 참으로 드물어서 그는 더욱 더 기뻐했다. 자신의 세월이 평화롭고 바람과 꽃이 어우러진 것이 무엇보다도 기특하여 기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비록 거짓과 기만으로 유지되고 있는 안녕이었지만, 그럼에도 길가메쉬는 제 계집과 아이만을 염두에 두는 잔인한 성정의 남자였다.
그가 자리를 비우자마자 저 아래 덤불에 숨어있던 어머니는 평소처럼 딸을 불렀다. 홍기가 아직도 감도는 딸의 뺨을 때리고 몇 겹을 겹쳐 두른 옷을 찢고 그간은 신경도 쓰지 않았던 침대 아래에 놓인 상자들과 과자 바구니들을 꺼내 밟고 촛대들을 부러뜨렸다. 미치기라도 한 것처럼 가위질 당한 옷을 껴안고 애원하는 딸을 매질하고 소리 질렀다. 왕이 숲에 두른 병사들이 아니었더라면 그녀는 정말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이미 배가 부른 아르토리아의 뺨을 분에 못 이겨 몇 번이고 내리친 어머니는 큰 가위를 꺼내어 저 가는 목을 자르는 대신 보물처럼 애지중지 길러온 머리카락을 통째로 잘라버렸다. 마녀가 거짓말로 꾸며온 세상이 찾아오고 아르토리아는 비참하게 비명과 울음으로 절망을 대신했다. ‘어머니’가 연인의 손에 꿰뚫려 죽는 그 순간에도, 아르토리아는 그가 거짓으로 안겨준 것을 저주했다.
“─배신자!”
어머니의 시체를 뒤로 하고 아르토리아는 푸른 리본을 팔랑이며 그의 팔에 단도를 박았다. 처참하게 잘려나간 머리카락이 아까워 길가메쉬는 설핏 피가 흐르는 팔로 소녀의 뺨을 감쌌다.아르토리아는 부른 배가 고통스러웠지만 인내로 얼룩진 분노로 그를 바라보았고 그는 스스럼없이 마주했다. 파문 하나 없이 가라앉은 붉은 눈이 푸른 눈과 마주했다.
“당신도 똑같았어, 어머니는 틀리지 않았어, 거짓말, 거짓말쟁이!!”
“거짓말 같은 것은 한 적 없다.”
그 새빨간 거짓말에 기가 막혀 푸른 눈이 눈물을 가득 담고 뚝 떨어졌다. 여름처럼 아름다웠던 소녀는 이제야 자신의 죄를 마주하고 스러져가고 있었다. 좋고 달콤한 것만을 속삭이는 사내가 실상은 어머니처럼 거짓말을 지속해왔던 것을 안 그 배신감에 그녀는 죽을 것만 같았다. 처음으로 아르토리아는 온갖 저주를 퍼부으며 그의 사랑과 허무를 욕하였다. 모든 것을 부정하는 그 모욕에, 처음으로 분노로 비틀어지는 그의 눈매를 보고 나서야 그녀는 속이 시원해지는 동시에 두려움을 느끼고 몸을 굳혔다.
“네가 아니면 감히 이 모욕을 넘기지 않을 것을 알아야 할 것이다.”
아르토리아는 겁에 질리고 가슴이 아파 몸을 돌려 숲으로 도망쳤다. 그가 선사하려 했던 거짓된 안녕과는 이별하지 않으면 안 되었으니까, 죗값을 치루지 않으면 안 되어 그녀는 저 멀리 숲으로 도망쳤다. 아무것도 없는 늪지대로 도망치는 그녀를 따라서, 연인은 그녀에게 마법과도 같은 울타리와 탑을 지어주었다.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서, 세상과 격리된 ‘또 하나’의 물 아래의 세상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