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은 넓고 환했다. 한낮의 빛을 품은 직사각형의 장식 격자들이 부족함 없이 방을 밝혔고, 호박색 융단은 축축한 냉기를 막아 성의 공기를 훈훈하게 덥혔다.
햇빛은 장미창을 타넘어 방 안을 떠돌았다. 그것은 먼지와 뒤섞이고 벽에 걸린 성주(城主)의 초상화 위를 배회하다가는 중앙에 앉아있던 푸른 비단옷의 여인을 비추었는데, 백금발을 촘촘히 땋아 늘어뜨린 여인의 뒷모습은 경건히 빛나 흡사 대리석을 깎아 만든 석상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 목에 걸린 진주 목걸이가 영롱한 빛으로 반짝였다. 여인의 곁에는 한 남자가 서 있었다. 키가 커 그림자가 진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으나 색색의 유리보다 화려한 풍모를 지닌 자였다. 진주 목걸이는 바로 그에게 받은 것이었다. 그는 뜻밖의 선물에 기뻐하는 여인의 목에 입을 맞춘 뒤 그 귓가에 무언가를 속삭였다. 두 사람은 해가 저물 때까지도 돌처럼 머물러 있었다. 그리고는 천천히 얼어붙어, 어둠 속으로 산산이 부서져내렸다.
그것은 버려진 성이 간직한 기억이었다. 지금은 주인을 잃어 황폐해진 성, 한때는 정원에 꽃이 피고 벽난로에 훈기가 감돌았던 성의 잊혀진 이야기이자 언제였는지도 모를 먼 옛날의 꿈이었다.
***
밤의 숲은 음산했다.
이랴! 내리퍼붓는 빗줄기에 지친 말들을 독려하는 마부의 외침이 마차 속 그녀의 귀에까지 들렸다. 새 신부를 호위하기 위해 성에서 보낸 황금빛 사륜 마차는 튼튼한 지붕과 바퀴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런 것으로 초조함이 가시는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마차가 똑바로 성을 향하고 있는지, 혹은 숲의 미로에 빠져 끊임없이 같은 곳을 돌고 있는지 그녀로서는 짐작할 길이 없었다. 짙은 연지로도 덮어지지 않는 창백한 기운이 두 뺨 위로 떠올랐다. 손 안의 비단 손수건은 진작에 땀으로 젖어 구겨져 있었다.
아르토리아는 곧 닥칠 미래를 상상하는 것으로 가슴을 파고드는 무력감을 잠재웠다. 그녀를 기다리는 성의 주인은 그 정체가 베일에 싸인 자로, 마을 사람들에게 “푸른 수염 백작”이라고 불렸다. 바로 그의 여섯 번째 신부가 된 아르토리아는 나고 자란 마을을 처음으로 떠나 낯선 성으로 지금 이동하는 중이었다.
왜 그가 푸른 수염이라고 불리는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것은 아르토리아가 아직 어렸을 적의 일이었다. 마을과 멀리 떨어진 성의 사이에는 험한 숲이 경계처럼 자리 잡고 있었는데, 언제부턴가 사냥꾼들 가운데 기묘한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숲을 헤매던 중에 멀리서 깜박이는 빛을 본 이들이 있다는 것이었다. 버려진 성채에 불이 밝혀질 리 없다며 처음엔 모두 허황된 소리로 치부했으나 증언들은 점점 불어났고, 급기야 호기심 강한 자들이 말을 달려 나섰다. 숲에서 돌아온 그들은 보고 들은 것을 떠들었다. 높은 귀족으로 보이는 한 남자가 성을 포함한 숲 너머의 토지를 사들였다는 얘기였다. “푸른 수염”이라고 불리는 그는 병든 아내의 요양을 위해 이 잊혀진 지방으로 내려왔고, 오랜 시간 버려져 있던 성을 개조해 지낸다고 했다. 그들이 몰고 온 소문은 한바탕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고 곧 잊혀졌다.
해묵은 소문은 불행의 전조처럼 다시 떠올랐다. 이 년 전, 성의 사자가 마을을 방문했다. 그는 성의 안주인이 죽었음을 알리며 푸른 수염의 신부가 될 처녀를 구했다. 혼기가 찬 마을 제일의 미녀, 선택받은 신부가 부러움 속에서 금마차에 올랐다. 그리고는 소식이 끊겼다.
염려와 공포가 마을을 감쌌다. 또 다른 신부를 찾아 돌아온 전령이 마을을 한층 극심한 두려움으로 몰아넣었다. 누구도 딸을 내어주려 하지 않았으나 마차가 싣고 온 재보 앞에선 꼼짝할 수 없었고, 처녀들은 신부가 되어 그 후로도 차례차례 사라졌다.
아르토리아는 막막한 기분으로 남편의 모습을 떠올리려 애썼다. 그녀는 막 열여덟 번째의 생일을 맞았고, 성의 재보와 스스로를 맞바꾸어 푸른 수염의 신부가 될 것을 자청했다. 가족들이 그녀를 간곡히 말렸지만 어려운 형편을 생각하면 달리 방도가 없었기에 아르토리아는 그들을 애써 설득했다. “백작님은 소문처럼 잔혹한 분이 아닐지도 몰라요. 그분이 절 진심으로 사랑하게 될지 누가 알겠어요?”
그녀는 스스로를 향해 읊조리듯 어머니와 동생들을 달랜 후 마차에 올랐다. 그럼에도 두려움이 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생피를 빠는 자, 날개 달린 괴물, 썩은내를 풍기는 병자, 악마, 사람들은 멋대로 그의 정체를 추측했다. 산 사람을 제사 지내는 이라고도 했다. 처녀들을 데려가는 것은 그 때문이라고, 정결한 피를 제단에 바치기 위해서라고 말이었다. 그러나 섣부른 추측들에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녀는 팔려가는 중이었고 성의 제물이나 다름없는 처지였으므로.
터질 듯한 불안감에 휩싸여 있을 때 격앙된 외침이 들렸다. “성이 보입니다!” 아르토리아는 더는 참지 못하고 비바람이 몰아치는 바깥으로 몸을 내밀었다. 여행자를 인도하려 메마른 입을 벌린다는 이야기 속 가시덤불처럼 빽빽한 나무들 너머 어른거리는 그림자가 보이기 시작했다. 숲의 출구가 가까웠음을 느낄 수 있었다. 푸른 수염의 성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것이었다.
그것은 날카롭게 벼려진 칼날 같았다. 세모꼴의 첨탑이 자욱한 안개를 뚫고 솟아나와 있었고, 아치에 새겨진 각양각색의 석조들이 지옥의 문지기처럼 성벽을 둘러싸 지키고 있었다. 중세의 고성, 저승에서 떨어져 나온 듯 음산한 성채의 모습에 아르토리아의 몸이 전율했다.
마차는 천천히 미끄러져 성의 입구에서 멈추었다. 성문이 소리 없이 열렸다. 지키는 이 하나 없는 어두컴컴한 구렁 속으로 아르토리아는 발을 내디뎠다. 불빛이 희미한 긴 회랑, 그 끝에 로브를 눌러쓴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성에 온 것을 환영하오.”
그가 손을 내밀었다. 흡혈귀, 저주받은 자, 괴물....... 아르토리아의 심장이 쿵쾅거렸다. 언뜻 로브 안에서 번쩍이는 붉은빛이 보인 것도 같았다. 그녀는 용기를 내어 물었다.
“당신이 저의 남편인가요?”
로브가 벗겨졌다. 수려한 용모에 아르토리아는 넋을 잃었다. 짧은 금발이 미간 위로 흘렀고 짙은 눈썹과 콧날이 그 아래로 음영을 드리웠다. 하지만 무엇보다 기이한 그 적안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심연에서 새어나오는 듯한 핏빛 눈동자가 아르토리아를 짓눌렀다.
“그렇소.”
***
성대한 예식은 필요하지 않았다. 짧은 입맞춤을 끝으로 아르토리아는 푸른 수염의 아내가 되었다. 그는 자신의 이름을 길가메쉬라고 밝힌 후, 낯선 수줍음에 떠는 아내를 밤새 품어 주었다. 이튿날 눈을 뜬 아르토리아는 간밤의 일이 꿈이 아님을 실감했다. 그녀는 그를 사랑하게 되었으며 빠르게 마을을 잊었다. 비가 그치자 음울했던 기운도 가셔, 성에서는 매일 웃음꽃이 피었다.
그녀는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정성껏 성을 돌보았다. 골방의 먼지를 떨어내고 수선화와 장미를 뜰에 피워냈으며 남편의 일거수일투족을 살폈다. 길가메쉬는 그런 그녀를 보석으로 장식하고 온갖 달콤한 말을 귓가에 속삭였다. “성의 모든 것이 그대에게 절하고 있다오.” 순백색 목에 걸린 진주 목걸이는 그의 수많은 정표 중 하나일 뿐이었다.
그만큼 길가메쉬는 다정한 남편이었다. 그는 자신의 모든 권한조차 아르토리아와 나누었고 그녀가 성의 어디든 출입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다. 단 한 번, 아르토리아가 지하의 북쪽 끝방이 잠겨있는 것을 의아하게 여겼을 때만 그는 낯선 사람처럼 얼굴빛을 바꾸었다.
“그 방은 그대에게 보일 수 없는 금지된 방이오.”
굳어진 낯빛에도 궁금증을 참지 못한 아르토리아는 묻고 말았다. 대체 어떤 비밀이 숨어있기에 누구의 접근도 허락하지 않느냐고 말이었다. 그러나 남편의 대답은 냉엄했다.
“그대는 꽃을 피게도 하고 지게도 하지. 나의 사랑을 믿는다면 아무것도 묻지 마시오. 믿지 못하겠거든 언제든 떠나도 좋소.”
거짓이 문 뒤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모르오? 그는 뜻 모를 물음을 던지고는 할 말이 끝났다는 듯 몸을 돌렸다. 그러나 수수께끼 같은 질문은 오래도록 아르토리아의 뇌리에 남아 떠나지 않았다. 그날 그녀의 가슴에 움튼 것은 의심의 싹이었다.
곁에 누워 곤히 잠든 남편의 금빛 속눈썹을 바라보던 아르토리아는 가늘게 피어오르는 의혹을 버리고 그의 결백을 믿었다. 그녀가 날마다 겪었던 더없이 다정한 미소와, 따스한 적안과 애정 어린 입술에 깃든 온기를 믿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그것들은 어떻게 설명해야 옳단 말인가. 아르토리아는 성에 시집오기 전부터 마을에 나돌던 흉흉한 소문들을 떠올렸다. 까맣게 잊고 지냈던 모략들이 그녀의 가슴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의 불신을 눈치채기라도 한 듯 길가메쉬는 어느날 예기치 않은 소식을 전했다. 잠시 성을 비워야 한다는 얘기였다.
***
채비를 마친 그는 마차에 오르기 전 아르토리아에게 한 꾸러미의 열쇠를 건네 성의 관리를 부탁했다.
“성의 모든 문을 여닫아도 되오. 단 그 방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열지 마시오.”
남편이 없는 성은 적막했다. 아르토리아는 뜨개질을 하거나 정원을 가꾸며 시간을 보냈지만 그것도 금세 시들해졌다. 새삼 그녀는 자신이 그를 얼마나 사랑했는지 깨닫게 되었다. 정원의 꽃이나 값비싼 장신구도 더이상 그녀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참다 못한 아르토리아는 성의 모든 방을 청소하기로 결심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남편과의 추억을 환기하려는 것이었다.
그녀는 시종의 손길도 마다하고 직접 팔을 걷어붙였다. 바쁘게 움직이자 다행히 외로움도 가시는 것 같았다. 달무리가 첨탑 끝에 걸리고 시종들도 모두 물러간 밤, 아르토리아의 생각이 문득 그 방의 존재에 미쳤다. 그가 발걸음을 금한 지하의 북쪽 끝방에.
가슴이 거칠게 뛰었다. 이제 그녀가 행하려고 하는 일은 남편의 뜻에 반하는 일이었다. 그가 성의 주인으로서 내린 유일한 명령, 단 하나의 금기를 어기고 남편의 과거가 잠들어 있는 비밀의 방에 도달하려고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결백하다면 그만일 일이 아닌가? 아르토리아는 등잔에 불을 붙이고 보는 이가 없음을 확인한 뒤 남몰래 계단을 내려갔다. 어둠 속에서 등불이 꺼질 듯 흔들렸다. 냉기 어린 돌벽이 그녀의 긴장을 더욱 부채질했다. 아르토리아는 조심조심 발을 옮기다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했다. 한 무리의 쥐떼가 축축한 공기를 가로질러 빠르게 사라졌다. 고작 쥐떼에도 소스라치게 놀란 그녀는 입을 틀어막고 걸음을 서둘렀다. 짙은 후회가 밀려왔지만 돌이키기에는 늦었다.
육중한 문이 보였다. 문고리는 장시간 버려진 것처럼 부식되어 있었다. 반신반의하며, 아르토리아는 열쇠를 구멍 안에 밀어넣었다. 문은 의외로 쉽게 열렸다. 그녀는 그 안으로 발을 내딛었다. 그리고 스스로의 눈을 의심했다.
그곳은 고문방이었다. 중세에나 있었을 법한 고문방이 아르토리아의 눈앞에 펼쳐졌다. 사슬과 갈고리, 보지 않았다면 믿기도 어려웠을 쇠붙이들이 피에 젖은 채 잔혹함을 낱낱이 드러내고 있었다. 하얗게 질린 아르토리아의 등 뒤로 철문이 굳게 닫혔다.
거짓이 문 뒤에 자리잡고 있다는 것을 모르오?
뜻 모를 말의 의미를 아르토리아는 정확히 깨달았다. 아내들의 호기심이 이 피비린내 나는 비극을 불렀다는 것, 또한 그가 여태껏 보였던 모습이 거짓이었다는 것에 그녀는 말문을 잃었다. 충격과 배신감으로 떨리는 다리에 힘을 주고 아르토리아는 주위를 살폈다. 이어지는 끔찍한 광경들은 꿈에도 본 적 없는 것이었다. 몸이 기괴하게 뒤틀린 피투성이 다섯 여인이 벽에 매달려 있었다. 그중 몇몇은 몸을 잘렸는지 그 머리와 팔다리가 땅에 뒹굴고 있기도 했다. 눈을 홉뜬 채 썩어가는 머리를 바라보던 아르토리아의 정신이 아득해졌다.
나는 지금 꿈을 꾸는 것인가.
그러나 이 한기는 꿈이 아니었다. 레이스 소매 아래로 드러난 맨살에 소름이 돋아났다. 형용할 길 없는 공포에 뒷걸음치던 아르토리아의 발에 무언가가 밟혔다. 하얀 눈덩이 같은 것들이 바닥에 깔려 있음을 그녀는 뒤늦게 깨달았다. 그것들은 끊어진 목걸이에서 흩어진 진주알이었다. 원래는 순백색으로 빛났을 진주알들이 번들거리는 눈처럼 아르토리아를 응시하고 있었다. 사방에서 쏘아보는 망령들의 시선을 견디지 못한 그녀는 손에 들린 열쇠를 떨어뜨렸다. 피로 물든 그것을 주워들고 아르토리아는 도망치듯 방을 떠났다. 몇 번이나 물로 씻어냈지만 열쇠의 핏자국은 사라지지 않았다. 이틀 후, 예상보다 일찍 돌아온 남편에게 그녀는 아무런 말도 건넬 수 없었다.
점심 식사는 폭풍전야처럼 고요했다. 식사를 마치고 아르토리아는 열쇠를 길가메쉬에게 돌려주었다.
“당신이 없는 동안 성을 잘 관리했어요.”
다행히 그는 별말이 없었다. 그녀는 안도하며 몸을 돌렸다.
“목욕물을 데울게요.”
그 때 아주 느릿느릿하고 엄중한, 기괴스럽기까지 한 목소리가 아르토리아의 발목을 붙잡았다.
“이 핏자국은... 무엇이지?”
“...무슨 핏자국요?”
아르토리아는 애써 웃어 보였다. 숱하게 예상했던 상황이었지만 핏기가 가시는 것은 어쩔 수 없었고, 열쇠 꾸러미를 유심히 들여보던 길가메쉬가 성큼 걸어와 그것을 내밀었다. 아르토리아도 익히 아는 얼룩, 녹슬어 윤이 벗겨진 열쇠 위에 새겨진 혈흔이 불빛 아래 드러났다.
“바느질을 하다 손을 다쳤는데 그때 피가 묻었나 봐요.”
“사실이오?”
“사실이에요.”
검붉은 눈동자가 아르토리아를 향했다. 냉혹한 시선이 영혼을 파낼 것처럼 섬뜩했다. 이윽고 길가메쉬의 입가에 소름끼치는 미소가 떠올랐다.
“거짓말을 하고 있군.”
“거짓말이라니요?”
“그 방을 열었지, 그렇지 않으냐?”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가요? 저는, 저는 절대로.......”
“무엇을 보았느냐.”
어느 틈에 남편의 말투가 바뀌었다는 것도 모르는 아르토리아는 그의 손을 뿌리쳤다. 적안에 스쳐간 고통을 그녀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 방에서 무엇을 보았냐는 말이다.”
“여보.......”
“네가 확인한 진실에 만족했느냐, 여자여.”
“먼저...... 먼저 속인 건 당신이에요!”
“먼저? 그래, 다른 계집들도 그렇게 말했다. 명령을 어긴 것은 생각지도 않고 하나같이 나를 원망하더군. 그래서 그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그들이 치른 대가는 너도 잘 알겠지. 그렇지 아니한가, 아르토리아?”
절규가 공기를 갈랐다.
“저, 저는, 길가메쉬.......”
“왜 너는, 너희들은...... 나의 사랑만으로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냐. 어째서 내 등에 칼을 꽂아야만 만족하는 것이냐.”
띄엄띄엄 말을 잇던 길가메쉬가 다가왔다. 어느새 그의 손에 칼이 들려 있었다. 상처 입은 붉은 눈이 광기로 번들거렸다.
“용, 용서해 줘요, 여보. 나는 당신을 여전히 사랑.......”
“더러운 입에 그것을 담지 말아라.”
그가 한 손으로 아르토리아의 목을 졸랐다. 목걸이가 올가미처럼 살을 할퀴었다. 그녀는 발버둥 끝에 간신히 벗어났다. 목걸이가 끊어져 진주알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부들부들 떨며 그를 마주보던 아르토리아는 파멸이 가까웠음을 직감했다. 그 칼에 찔리는 것이 누구이든, 아무리 도망쳐 봤자 그 끝에 남는 것이 죽음 외에는 없다는 사실 역시도 깨달았다. 종막은 이미 예고되어 있었다. 핏빛 절망과 복수의 막이, 배신당한 성의 주인에 의해 이제 오르려 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