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p of page

 옛날, 아주 먼 옛날. 아름다운 임금님이 다스리는 나라가 있었습니다. 임금님이 다스리는 나라는 풍요롭고 아름다웠습니다. 백성들도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임금님에게는 여신님의 저주가 걸려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임금님에게 한눈에 반한 여신님 때문이었습니다. 여신님은 임금님에게 구애했지만 거절당했습니다. 그리고 거절당한 여신님이 슬픔과 분노 때문에 눈이 멀어 임금님께 저주를 건 것이었습니다. 임금님이 사랑하는 사람은 불행하게 될 거라는 저주였습니다.

 

백성들은 여신의 저주를 받은 임금님을 안타깝게 여기고 슬퍼했습니다. 왕궁에서 호화로운 무도회가 열려도 여신의 저주를 받은 임금님은 혼자 옥좌에 앉아있을 뿐이었습니다. 임금님의 사랑을 얻고 싶어 하는 아름다운 여자들에게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습니다. 가까이에서 임금님을 모시는 신하들은 임금님의 쓸쓸함을 걱정했습니다. 사실 임금님은 여신의 저주를 그다지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다지 쓸쓸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임금님 본인을 제외하면요.

 

그러던 어느 날, 임금님은 혼자 말을 타고 밤 산책을 나섰습니다. 저주를 풀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말하는 신하들이 귀찮아서였습니다. 혼자 왕궁을 빠져나온 임금님은 마음껏 자유롭게 말을 달렸습니다. 달이 밤하늘의 꼭대기에 닿을 때까지 한참 즐겁게 말을 달리던 임금님은 달빛과 별빛을 받아 하얗게 빛나는 아름다운 호수를 발견하고 멈추었습니다.

 

호수 한 가운데에는 백조의 날개처럼 하얀 드레스를 입은 소녀가 서 있었습니다. 물 위에 맨발로 서 있는 소녀에게 임금님은 엄한 목소리로 물었습니다.

 

너는 무엇이냐. 이곳은 왕의 땅이다. 어찌 내 백성도 아닌 것이 허락 없이 발을 디디느냐.

 

사실 임금님은 여신에게 저주를 받았을 때부터 신이나 요정이나 마법 같은 것을 무척이나 싫어하게 되었습니다. 저주로 인해 불편한 것은 없었지만 귀찮아진 것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저주를 건 여신을 무척이나 싫어하기도 했고요. 그래서 호수 위에 서 있는 소녀를 바라보는 눈도 무척이나 차가웠습니다.

 

임금님의 물음에 소녀는 드레스 자락을 살짝 들어 올리며 고개를 숙였습니다. 임금님에게 무례를 사과한 소녀는 자신은 저주를 받아 밤 동안만 사람으로 있을 수 있고, 낮에는 백조의 모습이 되어 떠돌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 말에 임금님의 차가운 눈초리가 누그러졌습니다. 똑같이 저주를 받고 있는 몸으로서 동질감도 조금 느꼈습니다. 임금님은 소녀에게 손을 내밀어 곁으로 오기를 청했습니다. 잠깐 망설이던 소녀는 나비처럼 가벼운 걸음으로 수면 위를 가로질러 와 임금님의 손을 잡았습니다. 임금님은 소녀와 나란히 호숫가에 앉았습니다. 그리고 소녀가 어째서 저주를 받게 되었는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소녀는 사실 다른 나라의 공주님이었습니다. 늙고 병든 아버지를 대신해 공주님은 온 힘을 다해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그러나 공주님을 진심으로 이해해주는 사람은 나라에 몇 없었습니다. 공주님이 너무나도 올곧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공주님은 쓸쓸했습니다. 그렇지만 포기하지 않고 변함없이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리고 그런 공주님을 사모하게 된 한 사람의 기사가 있었습니다. 공주님이 믿고 의지하던 충신 중의 충신이었습니다. 그렇지만 기사는 공주님에 대한 충성심보다 자신의 사랑을 택했습니다. 하지만 공주님은 나라를, 백성들을 너무나도 사랑해서 기사의 마음에 답할 수 없었습니다. 자신의 사랑을 보답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기사는 슬퍼했습니다. 절망하고, 분노했습니다. 그리고 사랑을 받아주지 않는 공주님을 원망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타락한 기사가 되었고, 공주님을 저주했습니다. 기사의 저주로 공주님은 해가 떠 있는 동안은 백조의 모습이 되어버렸습니다. 저주를 푸는 방법은 공주님이 진정한 사랑을 만나 영원의 맹세를 주고받는 것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저주받은 공주님을 사랑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리고 공주님의 나라도 멸망해버렸습니다.

 

나라를 잃은 공주님은 긴 여행을 떠났습니다. 저주를 풀고 싶다고 바라진 않았습니다. 공주님은 그저 나라를, 백성들을 지켜주지 못한 것이 슬펐습니다. 구할 수 없었던 백성들을, 나라를 다시 한 번 구할 수 있기만을 바라며 공주님은 계속해서 여행을 해왔습니다.

 

이야기를 마친 공주님은 임금님에게 다시 한 번 사과했습니다. 임금님의 땅에 함부로 들어와서 미안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이 밤이 지날 때까지만 머물게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임금님은 공주님의 사과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공주님에게 계속 이 나라에 있어도 된다고 말해주었습니다. 더 이상 힘들게 떠도는 것을 그만두고 임금님의 왕궁에서 살라고 말해주었습니다.

 

임금님은 공주님이 좋았습니다. 한 점 흐림 없이 올곧은 마음으로 나라를, 백성들을 사랑하는 공주님의 깨끗한 마음은 임금님이 사랑할 가치가 있는 것이었습니다. 임금님은 공주님을 이해하지 못 한 나라의 백성들을, 신하들을 경멸했습니다. 공주님의 나라가 멸망한 것은 그들의 어리석음이 자초한 일이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백성들을 사랑하며 구하려고 하는 공주님의 어리석을 정도로 아름다운 마음을 사랑스럽다고 생각했습니다. 임금님에게 있어서 공주님의 사랑은 탐욕스럽고 이기적인 여신의 사랑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귀한 것이었습니다.

 

임금님은 공주님의 자그마한 손을 붙잡고 입을 맞췄습니다. 그리고 왕비님이 되어달라고 말했습니다. 갑작스런 임금님의 말에 공주님은 순간 당황했지만 곧 침착하게 구애를 거절했습니다. 백성들이 힘들어하고 있을 텐데 공주님 혼자 임금님의 사랑을 받으며 편하게 살 수는 없다고 말했습니다. 거절당했지만 임금님은 그런 한결같은 공주님의 마음이 좋았습니다.

 

임금님은 공주님을 끌어안았습니다. 오랫동안 홀로 떠돌아온 공주님의 몸은 무척이나 작고 가냘팠습니다. 임금님은 그런 공주님을 사랑했습니다.

 

어느덧 날이 밝기 시작했습니다. 밤의 여신이 치맛자락을 거둬들이며 서쪽 하늘로 서서히 걸어가기 시작했습니다. 하얗게 밝아오는 아침의 빛에 임금님의 품 안에 있던 공주님의 모습이 서서히 변하기 시작했습니다. 가장 먼저 가늘고 매끄러운 팔이 하얗고 아름다운 날개로 변했습니다. 임금님은 마치 기적처럼 공주님이 아름다운 백조로 변하는 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공주님은 백조로 변한 모습조차 아름다웠습니다. 하얀 날개를 활짝 펼치는 모습에는 경탄마저 나왔습니다.

 

임금님은 공주님에게 저주를 건 기사를 이해했습니다. 이렇게 아름다운 공주님을 자신만의 것으로 하고 싶다고 바라는 것은 무척이나 자연스러운 섭리처럼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임금님은 손을 뻗어 막 날아오르려고 하는 백조의 날개를 붙잡아 부러뜨렸습니다.

 

 

***

 

 

옛날, 아주 먼 옛날. 어느 한 나라에 여신의 저주를 받은 아름다운 임금님이 살았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그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 거라는 저주를 받은 임금님은 오랫동안 쓸쓸히 혼자 살아왔습니다. 백성들은 그런 임금님을 안타깝게 여겼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임금님이 어떤 아름다운 소녀를 왕궁에 맞이했습니다. 금빛 머리카락에 자그마한 체구의 소녀는 무척이나 아름다웠지만, 안타깝게도 걸을 수가 없었습니다. 이상한 방향으로 뒤틀려 버린 소녀의 작은 발목을 위해 임금님은 아름답게 장식된 발목걸이를 만들어 주고, 불편하지 않도록 무척이나 많은 배려를 해주었습니다. 시중을 들 시녀들을 잔뜩 붙여주고, 왕궁도 새로 지어주었습니다. 호수 한 가운데에 앉은 백조처럼 하얗고 아름다운 왕궁이었습니다. 임금님은 소녀를 그곳에 살게 해주었습니다. 그리고 매일매일 찾아가 소녀에게 사랑을 속삭였습니다. 백성들은 임금님이 더 이상 쓸쓸해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 기뻐했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여신의 저주를 걱정하며 가슴을 졸였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백성들이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아름다운 왕궁 안에서 임금님의 사랑을 받게 된 소녀에게는 더 이상 그 어떤 불행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임금님의 행복을 바라며 가슴을 졸이던 백성들은 임금님이 진정한 사랑을 찾아 여신의 저주마저 극복하고 행복해지신 거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백성들은 임금님이 드디어 행복해지셨다고 생각해 기뻐했습니다.

 

 

그리고 임금님은 백성들의 축복을 받으며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marchen - 금검메르헨합작
00:00 / 00:00

모든 그림과 글의 저작권은 본인에게 있으며 무단전재를 금합니다.

bottom of 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