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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이 사냥꾼에게 쫓기는 사슴을 구해준 것은 말 그대로 변덕이었다. 그는 변복을 한 채 잠행을 하고 있었고 고작 해야 사냥꾼에게 쫓기는 사슴 한 마리를 구하기에는 그 필요를 느끼지 못할 고귀한 존재였으니까. 그러나 사슴이 가진 푸른 털을 본 순간 왕의 마음은 바뀌었다. 왕은 그것이 어떤 것이든 진귀하며 가치 있는 것을 좋아했고 그 기준은 꽤나 제멋대로였다. 다행이도 사슴의 푸른 털은 그 진귀하며 가치 있는 것에 합당한 것이었고 왕은 소유욕이 강했다. 죽을 고비는 넘겼으나 왕의 소유물이 되어 감금될 위기에 처한 사슴은 제 몸의 호신을 위하여 아무런 거리낌 없이 선계仙界 최대의 비밀을 팔았다. 왕은 사슴의 이야기를 오롯이 믿어 그를 풀어줄 성격이 아니었으나 사슴은 상당한 달변가였고, 제 몸이 위험했기 때문인지 그렇잖아도 잘 돌아가는 혀는 기름칠을 한 마냥 약장수처럼 잘만 돌아갔다. 왕은 반신반의 하며 사슴이 알려준 선녀봉에 올랐다. 완전히 믿지는 않았으나 사슴이 말했던 선계의 풍경도 선녀봉에 내려올 선녀의 외모도 마치 눈앞에 보일 듯 선명했기에 차마 오르지 않을 수 없었다. 왕이 선녀봉 중턱의 선녀폭포에 도착했을 땐, 이미 서산너머로 저녁놀이 저물고 있었다. 왕은 숨을 죽인 채 나무그늘에 숨어 달이 하늘 가운데에 뜨기를 기다렸다.

 

반쯤은 사슴에게 속아 넘어간 기분으로 두어 시진 정도를 기다렸을까. 땅이 울리고 하늘이 뒤흔들리며 선녀폭포 저 위쪽 창공이 열렸다. 그 기이하고도 아리따운 광경에 왕의 요사스런 붉은 눈이 빛났다. 고작 해야 사냥꾼에게 쫓기던 사슴이 지고한 왕에게 거짓을 고할 리 없으나, 사슴이 말한 현상을 제 눈으로 확인하자 왕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그 푸른 털의 사슴 역시 진귀하며 가치 있는 짐승이지만 총명함과 늠름함 그리고 그 용맹함으로 널리 이름이 알려진 선계의 여선女仙보다는 못했다. 열린 창공에서 고귀하고 우아한 가마가 내려오고 있었다. 바람이 내려앉듯 선녀폭포의 변두리에 부드럽게 내려앉은 가마의 문을 열고, 더없이 찬란한 빛깔의 소녀가 걸어 나왔다. 사금빛 머리카락. 신록의 눈동자. 늠름하고 굳건한 자태. 아이도, 소녀도, 여인도 아닌 듯 기묘한 매력을 자아내는 여선은 그 존재 자체로 왕의 마음을 충족시켰다. 왕은 요염한 미소와 함께 여선을 훔쳐보는 것을 그만두었다. 신묘한 능력을 가진 여선에게 지금의 왕이 접근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왕은, 느긋한 마음으로 기다리기로 했다.

 

어차피 이 모든 것은 왕에게 있어 유흥이나 다름없었으니까.

 

왕의 존재를 알지 못한― 그리고 동료나 다름없는 푸른 사슴에 의해 팔려나간 것도 모르는 여선은 익숙한 손길로 몸에 걸친 갑옷과 그 아래의 날개옷을 벗고 선녀폭포에 몸을 담갔다. 맑고 깨끗한 물이 여선의 새하얀 나신을 적셨다. 여선에게 인계人界 외출은 년에 단 하루뿐이었기 때문에 여선은 매사에 침착하고 신중한 성격에도 불구하고 전에 없이 들떠 있었다. 여선은 왕의 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했고 선계의 여선들에게 허락된 이 장소가 발각되었다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달빛이 여선의 어깨에 부딪혀 하얗게 부서졌고 맑은 물이 아름다운 파동을 그렸다. 이 세상의 것이라곤 믿기지 않을 만큼 아리따운 풍경과 맑은 자연의 기운이 여선을 한층 더 생기롭게 만들었다. 십 수 년 동안 계속된 습관에 여선은 긴장을 풀고 맘껏 목욕을 즐겼다. 시리게 빛나던 달도 수줍게 반짝이던 별도 힘을 잃을 쯔음, 여선은 조심스럽게 선녀폭포 주위를 포위하는 병력을 느꼈다. 여선은 당장 자리에서 일어나 갑옷과 날개옷을 정돈해 놓은 자리로 뛰어들었다.

 

그러나 그곳엔 무엇도 없었다. 무엇도.

 

당혹스러움을 가리지 못한 채 멍하니 아래만 바라보는 여선에게 창칼이 겨누어졌다. 선계의 존재를 겨누었다는 부담과 죄책감에 창칼의 날 끝이 희미하게 떨렸다. 그러나 왕의 병사들은 물러설 수 없었다. 선계의 존재는 그 자체로 존귀한 숭배의 대상이었으나 왕의 진노는 코앞의 현실이었다. 사실 여선에게 겨누어진 창칼은 위협이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여선은 섣부른 행동을 삼갔다. 지금은 몸을 보호할 수단이 없었으니까. 눈앞에 펼쳐진 날 끝이 한 치라도 더 깊이 들어오면 여선의 생명은 끝난다. 그러면 푸른 사슴처럼 선계의 영수靈獸로 다시 태어나겠지. 묵직한 발걸음 소리에 여선은 시선만 옮겨 상대를 보았다. 화려한 금발. 요사스런 붉은 눈. 왕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이것을 찾는 것이냐.”

 

만족스러움을 가득 담은 요사스러운 목소리에 여선이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인계의 인간이다. 서른 명은 될 법한 병력을 동원한 걸 보면 보통 권력자는 아니리라. 하지만, 그렇다면, 지금 느껴지는 이 서늘한 요기는 무엇이지? 여선은 당장이라도 움츠러들 것 같은 어깨를 애써 모른 척 왕과 마주했다. 병사들이 원하는 것은 여선의 목숨이 아니었다. 여선의 목숨이 끊어지는 순간 왕의 진노에 병사들의 목숨도 끝난다. 여선은 왕의 뒤에서 자신의 갑옷과 날개옷을 든 남자를 바라보았다. 저 갑옷과 날개옷이 없으면 여선은 힘을 쓸 수 없다. 선계에는 없는 제약이었다. 그것은 오롯이 선인들이 함부로 인간의 목숨을 취하지 않도록 이루어진 것이었고, 지금 그 제약은 양날의 칼이 되어 여선을 겨누고 있었다.

 

“이게 선인의 날개옷이라지? 없으면 힘을 못 쓰는 것 같아 다행이로군.”

 

그 말이 신호라도 되는 양 왕의 뒤에 서 있던 남자가 갑옷과 날개옷을 바닥에 내려놓고 불을 질렀다. 인계에 내려선 선인이 날개옷 없이 무력한 존재이듯 날개옷 역시 선인의 몸에 걸쳐지지 않으면 그저 아름답고 우아한 의상일 뿐. 불꽃에 덧없이 타오르는 갑옷과 날개옷에 여선은 입을 악물었다. 목에는 여전히 창날의 날 끝이 겨누어져 있고, 날개옷을 불태우는 남자는 여러 병사에게 지켜지고 있었다. 여선은 달리 어찌할 방도가 없다. 그저― 제 목숨을 쥐고 있는 왕의 말에 따르는 것 밖에는.

 

왕궁으로 끌려온 여선은 그대로 아름답고 화려한 의상에 감싸여 왕의 곁에 앉혀졌다. 대접은 극진했고 여선에게 주어지는 모든 것이 장인의 손길을 거쳤으나 그것은 여선을 더욱 비참하게 할 뿐이었다. 왕궁은 피도 눈물도 없는 왕에게 철저하게 지배당하고 있었고 그것은 여선의 목을 점점 옥죄어 왔다. 낮에는 새장에 갇힌 새처럼 왕의 애완동물이자 왕궁의 가장 아름다운 장식품이, 밤에는 왕에게 바란 적 없는 사랑을 받는 나날. 여선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던 치욕을 견뎌야 했다. 견고했던 정신과 늠름하고 굳건한 자태는 점점 빛바래기 시작했다. 어느 날 여선의 배가 불렀다. 왕은 크게 기뻐했고 여선은 입을 다물었다.

 

왕과 여선은 아주 기인 나날들을 그리 보냈다. 처음엔 그저 변덕으로, 다음엔 마음에 쏙 드는 장식품이, 첫 아이가 태어날 쯔음엔 진심으로 여선을 사랑하게 된 왕과, 처음도 다음도 첫 아이가 태어날 쯔음에도 오롯이 왕의 모든 것을 참고 견딜 뿐인 여선은 행복했으나 행복하지 못했다. 그렇게 아이가 셋이 태어나고 첫 아이도 두 번째 아이도 세 번째 아이도 한결같이 왕을 아버지로 사랑하고 여선을 어머니로 사랑했다. 왕은 아이 하나를 더 원했으나 선인에게 허락된 세 명의 아이를 모두 낳은 여선에게 다음 아이가 잉태되는 일은 없었다.

 

여선에게 구원의 동아줄이 내려온 것은 세 번째 아이가 태어나고 한참을 지난 후였다.

 

여선에겐 오래토록 함께 해왔던 친우였고 전우였다. 몇 번이나 함께 요괴 토벌을 행했던 선계의 이름 높은 무장. 선계에서 늘 보던 무장과 함께 여선에게 주어진 궁으로 뛰어 들어온 선인은 방안에 즐비한 사치와 향락의 흔적에 슬쩍 눈살을 찌푸렸다. 무장의 손에는 직전까지만 해도 궁을 지키던 경비병이 들려 있었다. 여선은 무뚝뚝한 얼굴로 방을 훑어보는 선인을 향해 쓴 웃음을 지었다. 몇 번이나 생사고락을 함께 해 온 저 선인의 눈에 지금 제 모습은 얼마나 우스꽝스러울까. 선인은 손에 들고 있던 경비병을 패대기쳤다. 지친 흔적도 없이 원래도 붉었던 갑옷이 피로 젖어 더욱 진한 빛깔로 빛났다. 선인은 그 갑옷 안쪽에서 오색 찬란히 빛나는 꾸러미를 여선에게 건넸다.

 

“직녀에게 부탁하여 새로운 날개옷을 짜왔네. 갑옷도 함께. 자네처럼 훌륭한 선인이 여즉 인계에 붙잡힌 이유는 안 봐도 뻔하겠지.”

 

지금의 모습이 퍽 우습고 조소할 만도 한데 그런 눈치는 하나도 보이지 않는 선인의 모습에 여선이 잘 움직이지 않는 입매를 끌어올려 웃었다. 선인이 건네어준 갑옷과 날개옷이 있다면 얼마든지 선계로 돌아갈 수 있다. 그런 것이라면 굳이 선계 최고의 무장을 보내올 필요는 없다. 갑옷과 날개옷만 보내는 수는 얼마든지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직접 찾아와 이리 건네준 것은 함께 전장을 누볐던 친우이자 전우에 대한 예의이리라. 여선이 갑옷과 날개옷을 모두 갖춰 입음과 동시에 소란을 전해들은 왕이 불쾌한 얼굴로 방에 들어왔다. 왕은 형형한 눈빛으로 선인을 쏘아 보았고 선인 역시 타오르는 시선으로 왕을 내려 보았다. 여선은 왕과 함께 들어온 세 아이들에게 손을 뻗었다. 여선이 왕에게 가진 감정은 부정不淨의 감정 뿐. 그러나 자신의 태를 타고난 아이들에겐 그리할 수 없었다. 여선은 양 팔로 두 번째 아이와 세 번째 아이를 안았다. 첫 번째 아이를 업으려는 여선을 선인이 말렸다. 첫 번째 아이는 선인이 안아들었다. 왕이 저 멀리 내던져진 경비병의 검을 가져와 여선의 목에 겨누었다. 처음 만났던 순간과 달리 여선은 싸늘한 표정으로 검의 날 끝을 볼 뿐이었다.

 

“세이버.”

 

선인은 가볍게 여선을 재촉했다. 여선은 고개를 들어 왕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화려한 금발. 요사스런 붉은 눈. 요기로 가득한 기척. 그 모든 것이 처음 만난 순간과 다름없었다. 아마 자신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토록 변함이 없지는 않았을 텐데. 지금까지 왕에게 가져온 감정과 달리, 지금 순간에 느껴진 감정은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왕은 이미 인계의 그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공고한 위치에 오른 존재였다. 그러나 이토록 아등바등 가진 것을 손에서 놓지 않으려 애쓰는 모습이 무척―――

 

“잘 있어라, 길가메쉬.”

 

그 이상은 해야 할 말도 할 수 있는 말도 없다. 여선은 그대로 선인과 함께 선계에 날아올랐다.

 

왕은 하염없이 창공만을 바라보았다.

 

 

 

marchen - 금검메르헨합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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