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집 주제에 이고 있는 짐이 어찌나 무거운가 하였더니.”
그는 그야말로 간만에, 한숨이 자신의 의지를 이기고 터져 나옴을 느꼈다. 허탈한 웃음이 그에 섞여 나왔다. 아르토리아, 그 계집이 바란 것이 무엇이라고 이리도. 천 년 묵은 여우에게 홀렸더랬다. 무슨 소원이든 하나 이룰 수 있는 힘을 주겠다고 하였더랬다. 그 말을 믿고, 처음에는 단순히 한 가닥 바람이 있어 그것을 이루고 싶었다고. 그래서 시작한 일이었다고. 그는 빈 손으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 그런데, 그것이 잘 되지 않더군.
그리 말하며 그녀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두어 번 만지작거렸었다. 얼핏 묻어나올 것 같은 한숨을 참는 듯한, 혹은 이미 한숨이 나올 구석도 없다는 듯한 목소리로 그런 말을 입에 담았었다. 정말로, 잘 되지 않았다고. 자신이 원한 것은 그러한 것이 아니었다고. 그의 머릿속에서 과거의 그녀가 재생되었다.
- 처음에는 닭 한 마리였다. 그것으로도 꽤 긴 나날을 버틸 수 있었지. 그 무렵은, 그래, 잠시나마 기쁨에 들떴었다. 어리석게도.
손에 피를 묻히기 시작한 이상, 손을 뗄 수 없음을 몰랐다니 어찌나 어리석은 계집인지. 그는 혀를 찼다. 그러니 지금 이 사단이 난 것 아니겠는가. 덕분에 자신 또한. 어찌 하겠는가. 제 분수를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이가 어리석기 짝이 없는 짓을 저질렀으니, 자신이 구하여 주지 않고서 어찌 하겠는가.
시작은 닭 한 마리. 그 다음은 마을에서 자주 보이던 떠돌이 개, 뒷산에서 기르던 염소, 닭장 속에서 잘 길러지던 씨암탉 몇 마리, 이어서 개 두 세 마리 더, 그리고 그 전날까지만 해도 아무 탈 없이 건강하던 소 한 마리. 끝내, 건장한 사람 한 명.
정신을 차리면 손과 입에 피가 묻어 있었다고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꽤나 담담했었다. 그야, 이미 그녀에게는 익숙한 일이었을 터이니. 다만, 처음으로 목숨을 빼앗은 사람에 대하여 말할 때는 그러지 못함이 눈에 훤히 보여, 오히려 안쓰러울 정도였다. 그는 그렇게 기억했다. 눈동자가 떨리다 감기는 눈꺼풀에 가리는 것을 보았다. 소원을 이룰 힘을 얻어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었을 뿐이었던 소녀는 여우에게 홀려 여우만도 못한 존재가 되었다. 그는 어이없다는 웃음을 흘리며 평소와 같이 턱을 괴고 말했었다.
- 그래서, 네가 원하는 것은 결국 사람으로 돌아오는 것 아니더냐? 그렇다면 번거롭게 참을 일 없이 그냥 다 죽여버리고 힘을 얻어 사람으로 돌아오면 되는 일 아니겠는가. 짐이라면 분명 그리 하였을 터이다.
왜 그리 번거롭고도 수고로운 일을 자처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군. 그런 말을 덧붙였던 기억이 있었다. 사람이 아니게 되어버렸다며, 죽이기만을 반복하는 요물이 되어버렸다며, 자신이 할 수 있는, 해야 하는 일은 오직 그들을 되돌리는 것 밖에 없다고 읊조리는 그녀에게 말했었다.
- 누가 네놈과 같은 짓을. 내가 바라는 것은, 내가 저지른 실수를 없었던 일로 돌리는 것뿐이다. 설령, 그 길이 아무리 험난하다고 하여도, 포기할 수는 없는 것이란 말이다. 네놈 따위에게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일지도 모르지.
그때만은 그녀의 눈동자가 평소와 다름없이 강직한 뜻으로 가득 차 있었던 것을 기억했다. 물론 자신은 그러한 그녀의 모습을 코웃음 쳤지만. 짐이 말하지 않았더냐. 그러한 무리한 바람은 아르토리아, 네 허리에는 과하다고 말이다. 진작에 짐의 말을 들어 마음을 고쳤다면 얼마나 좋았겠느냐?
“사람이 되는 것도, 자신의 실수를 지우는 것도 모두 포기할 수 없다니, 어리석은지고. 짐이 몇 번이나 네게 알려주기를 바라기라도 하는 것이더냐? 대답하여 보거라, 아르토리아여.”
또 다시 닭 한 마리. 개 한 마리. 염소 한 마리. 소 한 마리. 그리고 또 한참 후에 다시 닭 한 마리. 또 닭 한 마리. 그리고 또 한참 뒤에 다시 사람 한 명. 더, 더 한참 뒤에 또 사람 한 명. 목에는 날카로운 발톱에 찢긴 상처, 팔과 다리에는 무언가에 눌려 벗어나려 버둥거린 흔적, 그리고 어느 죽음과 마찬가지로 구멍 뚫린 가슴과 빼앗긴 간.
그녀의 집 뒷산 한구석에는 손으로 만든 작은 묘들이 그득했다. 간 하나를 훔쳐올 때마다 묘 하나. 그리고 수를 셀 수 없는 사죄와 눈물. 사람의 그것을 손에 댄 날에는 그 울음이 더욱 거세었다. 주저앉아 양손에 얼굴을 묻고 눈물을 흘리는 그녀의 모습을 그는 보았다. 그럼에도 그녀는 포기하지 않겠다 하였다. 그리 말하며 부득불, 자신에게 의지를 부딪쳐 왔던 것이었다.
광대놀음이라 치부하고 지켜볼 것이 아니라, 일찍이 그 짐을 빼앗아버렸어야 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스스로 쓰러지기 전에 자신의 손으로 그 허리를 꺾어버렸다면 이리 참담하지는 아니하였으리라. 어여삐 가꾸었다면 가을 이삭의 색으로 빛났을 머리카락에 붉은 덩어리가 얽혀있었다. 그것은 그녀의 감긴 눈 위, 볼 위에도 흩뿌려져 어지러웠다.
그는 그녀를 자신의 무릎 위에 눕히고는 그녀의 볼을 쓸었다. 이미 감긴 눈을 구태여 다시 감겨주는 일은 없으리라. 그는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이리 되어, 이제 만족스럽더냐? 망령된 꿈 따위 버리고, 짐의 것이 되는 길이 빠르다 하였더니. 이 방법이 훨씬 더 빠르다고 보여주고 싶기라도 하였던 것인지.”
- 제발, 나를. 나를, 제발 죽여다오, 길가메쉬. 나는 이제 더 이상, 내가 더 이상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걷기 전에. 제발. 네놈의 손이라면 그 누구보다 빠르게 처리할 수 있지 않은가. 그러니, 제발.
길가메쉬의 입에서 다시 한 번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는 피가 묻은 검을 닦았다.
여우가 꼬리를 살랑였다.
…년 …월… 고을을 떠들썩하게 하였던 여우 요물을 처리하였다. 그 공적이 드높기 그지없었으나, 일체의 보상을 거부하고 다만 요물의 사체만을 남기고 사라졌으니 이후 행방이 묘연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