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절벽과 커다란 강으로 둘러싸인 숲에 꽃처럼 어여쁜 요정이 살았다. 우연히 마을로 돌아가던 여관주인은 저 절벽 아래에서 목욕하는 요정들을 보고 저처럼 예쁜 딸이 있었으면 하고 바랬다. 아직 혼인하지 못해 자식이 없었던 그는 매일같이 우유에 떠있는 찌꺼기를 국자로 내버리며 예쁜 딸이 하나 있었으면 좋겠다고 투덜거렸다. 한여름의 낭만으로 빛나는 금빛 달과도 같은 소녀는 진실로 귀엽고도 예쁜 용모였다. 그리 실로 짠 듯 고운 살갗으로 희게 빛나는 요정이라면 왕도 심히 기뻐하리라, 여관주인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이 마을에 들린 객客이 물었다. 그대 무엇을 버리고 계시오?
여관주인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내 딸이 씻고 나온 물이요.
정말 희고 고운 물이 나오도록 깨끗하고 맑은 계집이라면 필시 사람이 아닌 것이 분명했지만, 전부 믿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이 손은 가는 곳마다 여관주인의 딸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그처럼 신비롭고 아름다운 계집이라니 사람들은 만나는 이들마다 주전부리 삼아 소문을 퍼뜨렸다. 소문은 지지부진하게도 메아리처럼 사람들 사이를 안개처럼 헤집어놓았다.
그러던 차에 왕은 소문을 들었다. 황금의 궁의 계집들이 하나같이 우유를 뒤집어쓰고 시답잖은 연기와 같잖은 짓을 다하자 쫓아내고 매질하기도 진이 빠졌던 젊은 왕은 시답잖은 유행을 뿌리 뽑을 생각이었다. 그 계집을 궁에 데려올 것을 명한 왕은 민생을 빌미로 행차까지 나섰다. 한편 집행관에게 말을 전해들은 여관주인은 친구와 상의한 끝에 가마에 밀가루 인형을 태우기로 했다. 손에 실을 쥐고 마을 언저리 강까지 나갔을 때 그 실을 끊어버리면 자연스럽게 인형은 강에 빠질 터이니 그대로 익사라도 했다 하면 그야말로 만만세. 드디어 딸을 바치던 날, 딸이 겁을 먹었다며 온갖 치장과 흰 베일로 치장한 밀가루 인형을 직접 가마 안에 집어넣은 여관주인은 가마를 따라가다 물 위 다리를 건널 때 손에 쥐고 있던 실을 놓았다. 툭 물에 떨어진 밀가루 인형은 급류를 타고 작은 절벽 아래로 떨어졌고 모두가 황망한 틈을 타 여관주인은 목 놓아 울었다.
잃었다가 다시 찾은 아이를 잃은 것 마냥 애타게 우는 여관주인을 의심할 자는 없었지만, 안타깝게도 이 날은 여관주인이 그 소원이 간절히 빌었음에도 막히는 날이었다. 여관주인은 속으로 웃고 있었다.
젊은 왕의 목소리가 들리기 전까지는.
"끌어올려라!“
젊은 왕의 목소리를 듣고 여관주인은 바닥에 주저앉았다. 어째서 이곳까지 행차한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일이 틀어졌다. 안색이 하얗게 질린 여관 주인은 바닥에 주저앉아 쓰러져 신음했다. 아예 뿌리까지 뽑아 거추장스러운 것을 거두려 했던 왕은 빛나는 얼굴을 쳐들어 태양과 달이 부딪히듯 드러난 상신으로 팔을 들었다.
“계집을 찾지 못하면 네 놈들의 목이 달아날 줄 알아라.”
절벽 아래서 물놀이 하던 요정은 설핏 들리는 왕의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초록 나뭇가지 따라 들어 올려진 얼굴이 햇살에 비춰진 물처럼 반들반들하게 빛났다.
"찾지 못하면 아비의 목을 베어 이곳에 걸어두라, 감히 왕명을 무시하는 자 없으리라. 끌어올려라!!"
요정은 고고하게 머리를 쳐들고 맹수를 찾는 사슴처럼 주위를 살폈다. 저 절벽 위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이곳은 깊은 숲속이었고 나무들에 가려져 잘 보이지도 않았다. 절벽 아래 호수에서 요정들은 호수에 빠진 돌 마냥 신나게 놀고 있었고 배가 고플 때마다 호수에 드리워놓은 붉은 과실을 먹고 있었다. 그러던 그녀들에게 들이 밀어진 긴 막대기와 그물망에 요정들이 혼비백산해 도망가는 사이, 미처 도망가지 못한 고운 금발의 요정이 잽싸게 언니들의 품에 안겼다.
“아르토리아?”
웃기는 촌극이 벌어진 것이 분명했지만 사람의 목이 달린 것을 어렴풋이 들은 고운 요정이 언니들에게 애원했다. 저 폭정을 휘두르는 왕은 필시 그 밀가루 인형을 찾지 못하면 누군가를 죽이고 말테니까, 요정의 숲으로 피가 떨어지는 일이 없길 바랐기에 요정은 죽을 이를 가엾게 어겼다. 알지 못하는 이가 애처롭게 비명으로 애원하는 사이, 요정은 휘휘 내저어지는 그물망을 피해 다시 물속으로 몸을 내던졌다.
“그만두렴, 아르토리아. 물에 빠져 흐물거리는 밀가루 인형을 건져서 저들에게 건네줄 생각이니?”
마음만 급해 밀가루 인형을 찾아 헤매는 어린 요정을 끌어당긴 언니가 꾸중했다.
“마음만 급해 사고를 친 저 어리석은 치를 구하려면 더 좋은 방법이 있단다.”
“이곳에 떨어진 것은 이제 다 흐물거리는 밀가루 인형뿐인데, 아무리 휘저어도 잡힐 것은 신부복과 금장식뿐이에요.”
언니는 가만히 귀여운 동생을 내려 보고는 곧 답을 내어 주었다.
"저 그물 안에 대신할 아이가 들어가면 되지 않겠니.”
물 위로 올라온 요정이 언니에게 애원했다. 서서히 말라오는 옷을 털며 섬섬옥수 살랑이는 요정이 절벽 위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마주했다. 애처로운 목소리가 안쓰러워 요정은 잘 알 수 없었지만 일이 완전히 틀어졌음을 깨달을 수 있었고 다른 이들도 죽음을 바로 목전에 두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죽는 것은 너무해요.”
잠시 고민한 요정은 자신이 밀가루 인형을 대신하기로 마음먹었다. 다시 몸을 호수에 담군 요정은 여전히 호수를 국자처럼 내젓고 있는 그물망에 자신의 몸을 집어넣었다. 무게를 감지한 사람들이 작은 절벽 위에서 그물을 한껏 잡아당겼다. 아르토리아는 착하고 고운 성정이었고 그물망에 살이 배기도록 웅크리고 앉아 절벽 위로 올라가는 것을 기다렸다. 그리고 아주 잠깐 만에 요정은 물에 젖은 몸으로 흙바닥 위에 앉아야 했다. 흰 튜닉 하나 걸친 채 그물 안에 들어있는 소녀에 안도한 시종들이 소리쳤다.
"전하, 찾았습니다! 계집은 무사합니다!!"
시끄러운 사람들의 목소리 사이로 요정은 살풋 땅 위에 올려진 채 그물망을 홀로 빠져나오기 위해 힘겹게 바둥였다. 머리며 할 것 없이 물에 흠뻑 젖어 무거운 계집을 누군가가 거칠게 그물에서 끌어냈다. 맨발로 까칠한 흙 위를 걸어야 했던 요정은 다가와 자신을 일으킨 왕과 시선을 마주쳤다. 의지할 데 없이 그의 팔에 기댄 요정은 갑자기 자신이 홑천만을 걸치고 있음을 깨닫고 몸을 한껏 움츠렸다. 튜닉의 바깥천을 들어올려 자신의 얼굴을 가리려는 것을 제지한 왕은 거칠게 물에 젖은 천을 찢어냈다. 설핏 햇빛에 가려져 있던 고운 밀빛 금발과 깊은 숲을 닮아 검고도 맑은 녹빛 눈에 물이 젖어들었다. 정녕 곱기가 요정이라도 되는 것처럼 예쁜 소녀에 머리를 땅에 파묻고 있던 여관주인은 입이 벌어지고 말았다. 밀가루 인형이 요정이라도 되어 올라온 것인가,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무사’하다?”
왕이 재미있다는 듯 자신의 팔에 간신히 닿아있는 계집을 훑었다. 동그란 것이 귀엽게 젖은 머리카락을 내려보자 소녀는 조심스레 파르르 몸을 떨었다. 애초에 있지도 않던 딸이 어떻게 무사하단 말인가. 다만 생김새며 눈이 지나치게 적절할 정도로 그의 취향이었기에 그는 캐묻지 않았다. 소녀의 사랑스러운 얼굴을 가진 와중에도 곧게 물린 의젓한 티가 나는 것이 우아해서 길가메쉬는 이 어린 처녀가 저기 여관주인과는 단 한 끗의 혈연도 없음을 알았지만 이대로 계집을 거두기에는 이보다도 더 좋은 핑계가 없어서 손가락을 까딱였다.
“황금과 보석을 내리거라. 정녕 우유처럼 깨끗하고 맑지 못하더라도 왕의 여자이니라.”
쇳날과 피가 튀기는커녕 농을 할 정도로 기분이 좋아진 듯한 왕에 요정은 당황했다. 어떻게든 되겠지, 라는 마음으로 그물을 타고 올라온 것이고 일단 상황에 변수가 되기 위해 그물망에 몸을 맡긴 것이긴 했지만 정말로 눈 하나 턱 한 구석 닮지 않은 자신을 저 사람의 딸로 받아들일 거란 생각은 하지 못한 터였다. 당혹을 이기지 못한 소녀는 젖은 몸으로 왕을 밀치고 절벽을 향해 달아났다. 만약 그녀가 정말 탈출에 성공했더라면 이번엔 엉뚱하게 요정의 숲이 왕에게 유린당했겠지만, 어린 요정은 그런 것엔 전혀 생각이 닿지 못했다. 어디까지나 자신이 바라는 것처럼 모두가 상식대로 움직여 줄 것이라 생각하는 안일함 탓이었다.
“도망이라, 발 하나는 사슴처럼 빠르구나.”
물론 도망이 성사되는 일은 없었다. 팔 하나로 간단하게 요정을 제지한 왕은 소녀의 몸에 젖도록 품에 끌어안았다. 살짝 겁먹은 녹빛 눈이 휑하는 사이 아직 여인의 고운 태가 나지 않는 몸을 가볍게 들어 올린 왕은 시종을 불렀다. 도와줄 이를 찾느라 헤매는 사이 가볍게 들어 올려진 소녀는 그의 품에 안기자 빠져나가려 발을 허둥였다. 젖은 몸으로 왕을 불편케 하는 무례를 범하면서도 인지하지 못해 어설프게 난동을 부리는 것을 황금으로 빛나는 가마에 왕은 밀어 넣었다. 흙으로 물과 엉겨있던 하얀 발을 친히 비단 천으로 닦은 왕은 그것을 가마 밖으로 내던지고 창을 닫았다.
“하얗긴 하얗구나. 우유로 적셔질 만은 하구나.”
가마 안이 호화로운 양탄자와 금실 자수로 뒤덮여 있었던 것을 계집은 구경도 않고 천으로 몸을 감싼 채 가마 가장 안쪽으로 도망을 갔다. 천장이 조금 낮을 뿐 어지간한 작은 방 정도 되는 가마를 타고 있으니 어떻게든 남자의 손에 닿지 않으려는 것이라 길가메쉬는 크게 웃었다. 경계 가득한 녹빛 눈을 반짝이며 물을 뚝뚝 흘리는 계집은 나이가 한참 어려 보였지만 부풀 곳이 부푼 것을 보아 남자를 받기에는 충분해 보였다. 아닌 때 찾아온 낚시의 성과에 기분이 굉장히 좋아진 길가메쉬는 계집의 이름을 물었다.
"이름이 무엇이냐.“
귀여운 금발의 소녀는 갓 태어난 사슴처럼 다리를 떨면서도 그를 노려보았다. 빤히 알면서도 자신을 데리고 온 것을 원망하는 것이 그대로 드러나서 푹신한 천과 목침에 기대어 왕은 술잔을 기울였다. 젖은 옷이 피부에 스며들 듯 말라들었다. 자신을 해치지 않을 것을 알아 겁먹은 눈을 가만히 감은 아르토리아는 무릎 사이에 고개를 파묻고 잠에 들었다.
황금의 궁전에 도착한 왕은 그날 밤에 새로이 맞은 신부를 불러들였다. 예쁘게 단장한 요정은 유리처럼 잘 피어져 있는 금쟁반 위에 올려놓아져 왕에게 진상되었다. 열 명의 재단사가 몇 달을 걸려 짜낸 흰 튜닉 위 파란 비단 천을 꽁꽁 매 감은 요정은 당황하여 대리석 복도를 달려 도망치려 했다. 얼마 가지도 못하고 누가 발을 건 탓에 잔뜩 치장한 보석에 찧으며 넘어진 아르토리아는 기어이 뺨이 찢어져 피가 흐르는 채로 왕에게 진상되었다. 손부터 다리까지 한 곳도 남기지 않고 보석을 주렁주렁 매어 겁에 질린 요정을 왕은 침상에서 맞아들였다.
“시골 처녀답게 말은 없구나.”
몸을 가득 움츠렸던 아르토리아는 그의 팔을 할퀴며 떨쳐냈다. 재빨리 방의 한 구석으로 도망친 금발의 소녀는 가득 치장되어 있던 검을 빼어들어 허리를 살짝 굽히고 똑바로 쥐었다. 살짝 굽은 허리가 자신의 몸 위에서 움직이는 것을 상상한 젊은 왕은 상신을 드러낸 채 재미있어 크게 웃었다. 어찌 되었건 간에 궁에 들은 이상 자신의 계집임을 망각하면 안되었기에 길가메쉬는 소녀에게 다가갔다.
연한 금발이 푸른 꽃 장식으로 예쁜 목이며 몸이 가느다란 금장식으로 가득한 것을 감상하며 왕은 손을 까딱였다. 아무리 보아도 저 머리색이며 눈이 사람에게 있을 것은 아니라 가마에 억지로 태울 적 다친 손목의 상처가 다 아물어 있는 것을 보고 왕은 더욱더 자신의 직감을 확신했다. 금빛 머리카락이 날카롭게 서서 소녀를 응시했다. 아르토리아의 앞에 함께 몸을 굽힌 왕은 요정의 턱을 바로 눈앞으로 끌어당겼다. 날선 턱선으로 계집의 턱을 물고 약한 살결이 피가 맺히도록 힘을 준 왕이 시린 붉은 눈으로 요정을 내려보았다. 아이 다루듯 부드러운 손길과 태도가 거짓말인 것처럼 내뱉은 언사가 차갑고 무서워 요정은 그 기세에 눌려 압도당했다.
“네 아비가 죽는 것을 보고 싶으냐?”
요정은 할 말을 찾지 못해 턱을 붙들린 채로 푸른 눈을 파르르 떨었다. 왕의 신분으로 내리는 것이 고작 협박이라니, 체통도 뭣도 없는 웃전의 횡포였기에 요정은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네가 시침을 들지 않는 것은 상관없으나 이 궁에서 쓸모없는 것들은 다 내쳐질 것이니라. 그 죄로 네 아비가 목이 잘려도 좋으냐?”
“.....”
아르토리아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고 마침 눈에 띄는 쟁반과 그 위에 올려진 술병을 고이 들고와 그의 앞에 무릎 꿇었다. 그 곱고 고아한 얼굴로 눈을 내리 깔은 것이 정녕 요정과도 같아서, 젊은 왕은 무릎 꿇은 계집의 뺨을 자신의 손으로 감아보았다. 보석처럼 빛나는 초록색의 눈도 살가운 화색 감도는 흰 살결이 파도처럼 입 안으로 흘러들어왔다. 그 예쁘고 고운 얼굴로 내려앉은 복종의 의사가 심히 성에 차서 젊은 왕은 그녀의 소망을 들어 주었다. 손을 휘둘러 그녀가 방에서 나가는 것을 허락했고 시종장의 안내를 따라 왕의 여인들이 거처하는 서궁이 아닌 왕의 침소가 있는 동궁에 방을 배정받았다. 새로 온 계집이 밤이 지나기도 전에 물러나오자 기뻐한 여인들은 왕이 부름을 내릴 것이라 기대하여 다른 은총을 바라 들러붙은 이들을 시녀 부리듯 꽃단장을 했지만 왕은 홀로 새벽을 맞이하고 아침이 되자마자 팔에 금팔찌를 끼며 새로운 시녀를 찾았다.
“시골처녀를 데려오너라.”
이름도 말도 하지 않는 그녀의 호칭은 곧 시골처녀로 굳어졌다. 그리고 그날로 아르토리아는 곁에 시종까지 두고 밤새 지은 파란 비단옷으로 술잔을 든 채 복도를 걷고 있었다. 왕의 총애는 줄어들지 않고 매일을 더해갔다. 입을 열지 않아 왕의 희롱이 끊이지 않았지만 매일같이 그의 곁을 따르며 심지어 여인의 몸으로는 들어갈 수 없는 정무 회의에까지 자리했다. 왕의 시침을 들어왔던 여인들은 분노했다. 똑같이 후궁의 직첩 없이 왕을 시중드는 입장이라 하나 밤자리도 함께하지 않은 애송이가 흠모하고 애모해 마지않는 왕의 곁에서 매일같이 시중이라니, 분하지 않으면 이상한 일이었다. 이 황금의 궁에서 가장 강한 남자가 뒷배라고는 하나 이용할 만한 교활한 성정도 아니었으며 말조차 하지 못하는 벙어리 계집은 곧 틈만 나면 자신을 괴롭히는 이들의 잔혹함을 이겨내야 했다. 길가메쉬는 그러한 소행을 모르는 바 아니었으나 내버려 두었다. 기대어 앉아 그녀가 입을 여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다. 정말 벙어리라면 모를까 그물에서 막 건져냈을 때의 그 비명소리를 들었던 이는 앙탈을 받아주는 셈으로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골처녀를 데려오너라. 어제 자 먹는 것이 성치 못하니 남쪽에서 들어온 것을 내주어라.”
“시골처녀는 어디 갔느냐? 아침에 보아하니 머리에 흔한 빗 하나 없으니 내 체면이 궁하도다.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르라 하면 미련하게 하나도 안 볼 것이니."
“말이 많구나, 네가 공신임을 믿어 건방을 떠는 것이냐? 말을 못하는 계집이 아니라 눈이 멀어 없다 해도 감히 네가 신경 쓸 바이더냐?”
“시골처녀는 어디 갔느냐? 데려와 술이나 따르게 해라.”
매번 길가메쉬의 말이 궁전을 울릴 때마다 새초롬하게 미간을 찌푸린 처녀는 고개를 돌렸다.
이름 높은 숲의 요정이 한낱 시골처녀로 전락한 처지에 굉장히 불만을 품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을 한낱 시골처녀로 격하시켜 희롱하는 언사에 아르토리아는 자존심에서라도 더욱 굳게 입을 다물었다. 반면 왕이 한 계집에게 지존의 신분으로 내리는 마르지 않는 성총에 시샘과 질투가 넘쳐흘렀다. 비록 총애를 받고 있다 하나 시침을 들지 않은 것은 분명한 사실이니 왕의 변덕을 의심한 자들이 여인들의 사주를 받아 해하는 것도 자주 있는 일이 되어 버렸다. 옷에 바늘이나 날카로운 것이 꽂혀 있고 가볍게 발을 걸어 넘어뜨리는 것은 더욱 잦았으며 먹는 음식에 유리조각을 넣는 자잘한 괴롭힘은 끊이질 않았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르토리아는 단 한 번도 입을 열지 않았다. 벙어리라 알았으니 괴롭힘은 나날이 더해갔고 글조차 모른다는 추측까지 더해지자 그 심해지는 정도에 박차가 가해졌다.
“왕비가 되고 싶지 않으냐.”
왕이 하루는 그녀를 불러 꿇어앉히고는 장난스레 질문을 던지자 드디어는 그녀를 죽일 음모까지 꾸미기 시작했다. 아르토리아가 시골처녀라는 칭호에 불만을 품고 볼을 부풀리는 사이, 이 한 마디가 불러일으킨 것이 있었다. 계집들의 시샘과 질투가 극도에 달하니 막 잠에 들려던 참에 시녀들에게 잡혀 정원에 끌려 나왔다. 물과 귀뚜라미가 시끄럽게 떠드는 사이 멍한 그녀에게 그네들이 억지를 부렸다.
“오늘밤 물을 다 길어 놓지 않으면 매질을 당할 줄 알아라.”
겨울에 피는 꽃들을 가져다 놓고 이 여름밤에 틔워 놓으라는 명령과 억지에 요정은 홀로 화단에 남겨져 한숨을 내쉬었다. 전하의 술에 쓰일 꽃들은 무엇이고 이튿날 아침까지 틔워 놓지 못하면 당할 매질은 또 무엇인가. 다만 어쨌건 간에 여인들의 일에는 간섭하지 않는 이를 알아서 아르토리아는 조심스럽게 꽃들에 다가가 입김을 불어넣었다. 마법이 담긴 요정의 숨결을 따라 차가운 겨울이 꽃을 피웠다. 일을 마친 요정은 다시 자신의 침소에 돌아가 잠에 들었다.
아르토리아가 나무와 숲을 거닐고 호수와 시내에 잠겨 노닐던 시절을 꿈꾸던 사이, 새벽같이 일어나 그녀를 매질하러 나온 여인들은 화단에 핀 꽃들을 보고 경악했다. 한여름에 필 일이 없는 겨울 꽃들이 가득 핀 것을 목두한 것들은 조금이라도 왕의 눈길을 받고자 싸우다 화단의 돌과 기둥에 머리를 박고 죽고 말았다. 미련한 까마귀처럼 죽은 여인들을 보고 요정은 피워낸 겨울 꽃들로 고이 술을 담구어 왕에게 진상했다. 여전히 자신을 시골처녀라 부르며 놀리는 왕이 분하긴 했지만 자신의 본분을 잊는 일은 없었다.
겨울꽃을 가득 피워낸 후 감시는 더욱 심해졌다. 도통 마법을 부릴 수 없어 며칠 밤낯을 고되게 몸으로 일해야 했던 요정은 잠이 부족했다. 두 번째로 주어진 괴롭힘은 왕이 키우는 동물들이 오가는 복도를 깨끗하게 청소하는 일이었다. 그야말로 쉴 새 없이 흙발로 복도를 더럽히는 맹수와 새들을 멈추는 일은 불가능이라, 잠조차 들지 못하고 아르토리아는 틈틈이 허락된 쪽잠으로 왕의 시중을 들고 있었다. 호리병 하나, 걸레 하나로 복도를 청소하라는 말도 안되는 괴롭힘을 버티고 있는 것은 오로지 그녀가 요정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세 번째 날, 드디어 모두가 잠들고 감시하는 이도 드디어 기둥에 기대어 앉아 잠에 든 것을 확인한 아르토리아는 몇 번을 걸레로 닦아도 깨끗해지지 않는 복도를 보고 묘수를 생각해냈다. ‘깨끗하게 만들면’ 이 고된 일에서 놓아주겠다는 약속을 떠올린 그녀는 마침 들고 있는 호리병에 멈추지 않는 물이 흘러나오도록 마법을 걸었다. 복도가 시작되는 회랑 한가운데 호리병을 눕힌 아르토리아는 호리병의 물이 시냇물을 이루어 물에 잠긴 복도가 깨끗하게 씻어내려지는 것을 보고 만족하여 침소에 돌아갔다. 아침에 복도에 돌아온 아르토리아는 경악한 시녀들을 뒤로 하고 다시 왕에게 돌아갔다. 물에 잠긴 복도는 깨끗했고 호리병 역시 물 속에 동동 떠 있었으니 그녀의 마법을 알아챈 이는 없었다.
“시골처녀에게 금은과 한 상자의 보석을 내리거라.”
그 이야기를 전해들은 왕은 아르토리아에게 재보를 하사했다. 자신을 또 시골처녀라 칭하는 왕에 고고한 요정의 눈썹이 파르르 떨렸지만 왕은 모르는 척 고개를 돌렸다. 하나같이 자신들의 모략이 통하지 않자 분개한 여인들은 자신들이라도 왕의 눈길을 받고자 했다. 밤새 잠도 이루지 않고 우물물을 긷다 그 무게에 이기지 못한 계집들이 우물에 빠져 죽었으며, 우물에 빠져 죽지 않은 계집들은 사람에게 죽었다. 제대로 들지도 못하는 물통들로 왕의 심기를 거스른 계집들은 멈추는 일 없이 목이 잘려 그 피로써 궁을 닦았다. 한편, 그 며칠을 쪽잠도 제대로 자지 못한 아르토리아는 졸음을 간신히 참으며 기둥 곁에 무릎 꿇고 앉아 왕의 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까이 오라는 명 하나에 졸음으로 눈을 거의 감다시피 한 요정은 가냘픈 허리로 그의 품에 안겨 술잔처럼 흔들렸다. 불편함을 호소하는 계집아이를 품에 안은 왕은 그대로 침상에 누워 하루를 보냈다.
두 차례의 변고가 지나가고, 아르토리아는 더 이상 자신에게 접근하는 이들이 없으리라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어짜피 자신은 요정이었고 그들은 범인凡人이었다. 왕에게 붙들려 시중을 드는 자신이었지만 시골처녀라 불리건 아니건 간에 그녀는 피가 흐르는 상처조차 금세 아물어 버리는 요정이었다. 이젠 어디로 끌려 다녀도 놀라지 않는 아르토리아는 한창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두 차례의 소동에 죽어나간 여인들은 꽤 많았고 다른 일로 죽어나간 후궁의 여인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소복을 입을 일 없었던 왕의 계집은 나날이 쌓이는 보석으로 자신의 몸을 치장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하사되는 비단천은 한낱 ‘시골처녀’, 혹은 왕의 시중밖에 들지 않는 계집에게 내려질 것이 아니었다.
다만 높아지는 자신의 지위에도 불구하고 요정은 사람의 욕심과 질투라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것인지 간과하고 있었다. 자신이 너무 청렴하고 고고하여 생각지도 못했던 것일까, 두 차례의 변고가 지나서 자신을 건드릴 이가 없을 거라 안일하게 생각했던 것일까. 느닷없이 왕이 행차로 궁을 비운 사이 자신을 끌고 나가 주방에 밀어넣을 때까지 녹빛 눈을 요정은 깜빡이고 있었다.
“시골에서 올라온 촌것이 우리를 다 죽일 셈이냐? 요망하게 전하를 홀린 것으로도 모자라 감히 우리를 해하려 들어? 그 전에 우리가 널 죽일 것이다!”
화덕 안에 밀쳐진 요정은 철컹 쇠문이 닫히고 그들이 정말로 불붙은 장작을 자신에게 내던지자 정말로 분노하고 말았다. 아무리 숲을 따라 온순한 성정이라 하나 부싯돌 내리쳐진 돌멩이처럼 불이 붙어버렸다. 끊이지 않는 억지와 괴롭힘, 누명을 참고 견뎌 줄 정도로 그녀는 어리석지 않았고 그런 우매한 아량 따위 가져본 적도 없었다. 드디어 아름다운 용모만을 믿고 자신하는 계집들이 승리를 확신하고 돌아서려는 사이, 정말로 화가 날 대로 난 요정은 마법으로 쇠문을 열어젖히며 그녀들에게 불을 질러버렸다.
“이리 오너라.”
왕이 불렀다. 마침 왕이 돌아올 것을 기다리며 꽃술을 들고 가고 있었던 요정은 엉망으로 흐른 술병과 잔을 껴안고 꽃 뒤에 숨어 울고 있었다. 아르토리아는 막 서궁의 화덕에서 도망쳐 나온 참이었고 처참한 비명과 함께 불타던 계집들은 화마를 구하러 온 시종들에 의해 구해졌다. 그의 궁전이 반쪽이 타고 있었지만 그는 화내지 않았다. 저 뒤에서 궁을 밝히는 하늘이 주황색으로 물드는 것을 아르토리아는 겁을 먹고 미안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나 길가메쉬는 화내지 않았다.
“불을 지른 죄는 묻지 않을테니 이리 오너라.”
“거짓말.”
왕의 말을 믿지 못해서가 아니었다. 그저 화가 나 반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부드러운 언사보다는 생각지 못한 순간에 흘러나온 말에 두 사람 다 조금 놀랐다. 고고한 성정과는 다르게 억울함과 원망으로 단단히 화가 난 요정은 붉어진 얼굴로 도망가자 왕이 말했다.
“짐이 널 잡길 바라느냐?”
우물로 달려가던 발걸음을 멈춘 요정의 틈을 타 잠시 높이 세웠던 미간을 좁히고 길가메쉬가 의아하게 물었다.
“어찌 그간 말하지 않았느냐.”
그걸 몰라서 묻는 것인가. 울컥한 아르토리아가 나무 뒤에서 소리쳤다.
“당신이 시골처녀라고 놀리니까...!”
“흐하하하하하하하!”
고작 그것 때문이었나, 크게 웃은 길가메쉬는 요정을 붙잡기 위해 나무 가까이 걸어왔다. 요 몇걸음만 더 달려가 우물로 뛰어들면 고향으로 도망갈 수 있는 것을 아르토리아는 도망가지 않고 나무뿌리만 사뿐사뿐 넘어서며 왕에게서 도망쳤다. 품 안에 안겨 있던 술병도 술잔도 이미 바닥을 구를 기세였다. 멀리 가지도 않을 거면서 잡힐 듯 잡히지 않을 듯 손에서 안달나게 벗어나는 것을 젊은 왕은 분통이 터지는 와중에도 웃었다. 자신과는 다르게 여지껏 느긋하기 그지 없는 왕의 태도에 더욱 분통이 터진 요정이 울음을 터뜨릴 것처럼 화를 냈다.
“바보, 멍청이! 거짓말쟁이! 바보!”
“알았으니 이리 오너라.”
한층 누그러진 목소리로 왕이 불렀다. 뚫린 입이랍시고 감히 자신에게 망언을 쏟아내는 요정을 벌할 생각이 없어서 그는 재빠르게 요정을 낚아챘다. 일부러 도망가지 않고 자신에게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가 껴안지 못하게 그의 가슴을 밀어내는 요망한 것을 길가메쉬는 강하게 품 안에 끌어안았다. 파란 비단천이 그의 붉은 천과 얽혀들었다. 심술도 심술이고 앙탈도 앙탈이었으니 그녀는 품 안에서 갓 태어난 어린 짐승처럼 버둥였다. 그런 심술궂은 반항을 무시하고 왕은 요정의 이름을 물었다.
“이름이 무엇이냐.”
요정은 잠시 고민했다. 요정의 이름을 인간에게 말해버리면 꽤나 위험하다는 것을 어리지만 그녀는 잘 알고 있어서 붉은 하늘로 물드는 녹빛 눈으로 요정은 잠시 파르르 떨었다. 자신의 눈을 물들이는 것이 마치 저 하늘이 아니라 지금 자신을 끌어안은 남자의 눈 같아서, 요정은 저도 모르게 입으로 중얼거리고는 두려움에 떨며 그의 품에서 벗어났다. 갑자기 밀쳐진 왕이 방심을 한 사이 요정은 맹수를 마주한 사슴처럼 달려가 우물에 몸을 던졌다.
요정은 물길을 타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요 며칠을 게으르게도 아무것도 않고 그 여독만을 푸는데 집중하고 있던 요정은 전과 다르게 물꽃을 말리고 익은 과실을 거두는 일에는 관심이 스러진 터였다. 마저 익지도 않은 과실을 튿어버리질 않나 풀을 달라 다가오는 토끼에게 작게 심술을 부리는 등 전과 달리 평화롭지 못한 모습에 언니들은 그녀를 걱정했다. 잠시 인세人世에 나간 사이 인간의 속됨에 물든 것인지 그 숲의 요정은 숲의 정경에 녹아들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름이 막 지나고 가을의 중반을 지나 곧 겨울이 다가올 적에, 요정은 털갈이도 마치지 못한 풀 뜯는 짐승들이 놀라 도망치는 것을 보고 물 위에서 일어났다. 파문이 일어나는 호수 위에서, 고개를 갸웃거리고 돌리자 저 멀리서부터 보이는 화려한 꽃뭉텅이에 그녀는 잠시 할 말을 잊고 말았다. 그것이 꽃가마라는 것을 알아차린 아르토리아는 저도 모르게 눈을 한껏 비볐다. 언니들도 몸을 감추고 짐승들도 저 나무 뒤에 숨어버린 사이, 가까이 다가온 꽃가마와 시종들을 뒤로 하고 젊은 왕이 그녀를 불렀다.
“아르토리아.”